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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경남역사

[아하! 경남역사]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 장군’

일제강점기 시절, 머나먼 타국에서 일제와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로서 장군 칭호를 받는 이는 많지 않다.

그런데 그중 여장군이라는 칭호를 얻은 이가 있다.

바로 조선의 잔다르크라고 불렸던 \김명시(金命時·19071949) 장군이다.

사망한 지 73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김명시 장군을 소개한다.

배해귀

     

총과 확성기를 들고 일본군과 맞서 싸워

19461121일자 <독립신보> ‘여류 혁명가를 찾아서-20년간 투쟁 생활, 태중(胎中)에도 감옥살이, 김명시 여사편에 실린 인터뷰 기사다. 김명시 장군의 겸손한 표현이지만 그의 독립운동은 결코 빈약하지 않았다. 192720살 때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한 그는 1930년 중국 하얼빈에서 일본 영사관과 기차역, 경찰서 등을 공격했다. 이듬해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제국주의 타도와 한국 독립을 목적으로 상해한인반제동맹을 조직하였고, 1932년 귀국해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7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당시 임신중이었던 김 장군은 일본 경찰에게 배를 맞아 유산을 당하는 등 험난한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출옥 후 1942년 중국으로 건너가 조선의용군 제1선 적구여자부대를 지휘한 그는 텐진·베이징 등에서 첩보와 초모(모병) 활동, 선무공작(宣撫工作)을 펼쳤다. 당시 한 손에는 총을, 다른 손에는 확성기를 들고 일본군에 맞서 싸워 백마 탄 여장군이라고 불렸다.

   

마산 출신, 남매가 함께 독립운동 펼쳐

김명시는 1907년 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동성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마산 사회주의 운동의 맹주인 오빠 김형선과 남동생 김형윤, 여동생 김복주와 함께 자랐다. 19243월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오빠의 권유로 서울로 유학하여 배화공립고등여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 중퇴하였다. 이후 러시아 모스크바 공산대학으로 유학을 떠났고 1927년 중국 상해로 파견되어 대만·필리핀·베트남 등지 독립운동가와 함께 항일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73년 만에 건국훈장 애국장추서

광복 이후 그는 서울로 돌아와 조선부녀총동맹 간부, 민주주의 민족전선 중앙위원을 역임하며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활동했다. 19451223일 동아일보에 게재된 김장군의 귀국 소식은 1면에 실릴 정도로 당시 그를 따르는 이들이 많았다.

부하 2000명을 가지고 항일전에 활동하여 무훈을 세운 우리 조선의 짠타크여장군 김명시 여사.”

그러나 이러한 활동에도 정부 수립 이후 거세진 이승만 정권의 좌익 숙청 작업 탓에 갑작스러운 최후를 맞았다. 1949916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같은 해 1010일 부평경찰서 유치장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그동안 사회주의 계열 운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독립운동활동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김 장군은 창원의 한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지난 8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을 펼치고 장군 칭호까지 받았지만 그의 고향에서조차 잊힐 뻔했던 김명시 장군. 사망한 지 73년이 지나서야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지만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의 정신은 계속해서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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