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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포토

[공감포토]호국해병 흔적을 따라

  



진동리지구 낙동강방어선 최남단 요충지

함안의 남쪽에 우뚝 솟은 여항산을 둘러싸고 있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진동진북면 등 이른바 삼진 지역과 함안군여항군북면, 그리고 통영은 해병대 호국의 땅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의 기습남침으로 속절없이 밀리던 국군은 전쟁 발발 한 달이 조금 지난 1950년 8월에 들어서면서 전열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임시수도 부산을 사수하기 위해 낙동강을 기점으로 전선을 형성한다. 당시 전선을 책임진 워크 미 8군 사령관이 낙동강방어선을 선포한 때도 이때쯤이다.

낙동강방어선이 형성되기 전부터 이곳은 이미 더 이상 밀릴 수 없는 마지막 전선으로 무거운 전운이 감돌았다. 남해안을 따라 부산으로 가는 길목인데다 마산과 진해 등 전략적 요충지의 담벼락 역할을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기습 한 달 만에 남한 땅의 3분의 2를 넘게 점령한 적군은 7월 말경부터 부산을 함락하려고 압박을 가해왔다. 이 가운데 북한군 제6사단은 호남 방면의 국군을 추격하면서 목포와 여수를 점령하고 마산 공격을 주 임무로 했다.

미 8군은 북한군 제6사단의 우회기동이 마산을 거쳐 부산을 점령하려는 의도라는 점을 간파하고, 경북 상주 남쪽에서 방어 중이던 미 제25사단을 마산 방면으로 이동시켰다. 킨(KEAN) 소장이 지휘하는 미 육군 제25사단에는 미 제24사단 1개 연대와 미 해병 제5연대가 긴급 배속됐다. 국군도 서부지구 전투사령부에 배속된 해병대의 김성은부대와 육군의 민기석부대, 최천 경무관이 지휘하는 경찰부대 등이 이 전선에 합류했다.

 

병대 김성은부대 맹활약 전세 반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에서 국도 14호선 구도로를 따라 고성통영 방면으로 가다보면 진북면소재지인 지산리를 조금 지나 도로변 오른쪽 야산자락에 해병대진동리지구전첩비가 있다. 1950년 8월 초순 여항산을 중심으로 진전진동전북여항군북면 일대에서 적군을 격퇴한 대한민국 해병대의 투혼과 공훈을 기리는 기념비다. 이곳에 해병대전첩비가 세워진 연유는 이렇다.

후에 해병대사령관과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김성은 중령이 이끄는 해병대 김성은부대는 1950년 7월 여수에 상륙해 남원전투와 함양백암산전투, 진주전투를 거쳐 7월 31일부터 진동리지구에 투입됐다. 김성은부대는 이 지구에 투입된 지 4일째인 8월 3일 진주방면에서 전차를 앞세우고 발산고개를 넘어 진격하던 북한군 제6사단 정찰대대를 진동리 서방진전면 고사리 지역에서 기습 공격해 궤멸시키는 전공을 세운다. 이 전과로 김성은부대는 전 부대원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안았다.

김성은부대는 이어 미군 킨특수임무부대를 주축으로 8월 7일부터 13일까지 진주방면의 발산고개를 향해 전개된 반격작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반격작전 개시 전날 밤 김성은부대는 적의 중화기에 의해 차단당한 진동리-마산간의 보급로를 타개하는 한편, 여항산으로 이어지는 야반산, 수리봉, 서북산 일대의 적을 격퇴하고 고지를 점령했다.

그리고 진북과 함안을 우회 기동하여 군북면 남쪽의 오봉산과 필봉의 적을 섬멸해 북한군 제6사단의 필사적인 공세를 꺾었다.

부산을 점령하려는 북한군의 기도를 좌절시킨 진동리지구 전투는 적과 맞서 승리한 의미있는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해병대의 승전소식을 접한 국민들은 승리에 확신을 갖게 되고, 미군도 한국군의 전투력을 인정하는 계기가 됐다. 해병대사령부는 이 전공을 기려 1992년 12월 당시의 격전지를 조망하는 곳에 해병대진동리지구전첩비를 세웠다.

 

미군 희생 큰 여항산 갓데미산으로

여항산은 지역주민들 사이에 갓데미산이라고도 불린다.

625전쟁 당시 여항산과 그 남쪽의 서북산 등 이 지역 고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살아남은 미군 생존자들이 후퇴하면서 전우를 잃은 마음에 여항산을 뒤돌아보며 빌어먹을 제기랄이라는 뜻의 영어 감탄사 갓뎀(goddam)이라고 연발한 데서 유래됐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울지도 웃지도 못할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낙동강방어선 진동리지구전투에서 미군의 희생이 컸다. 서북산 정상에 서 있는 서북산전적비가 당시 미군의 희생을 보여준다.

진동리지구의 야반산-수리봉-서북산-여항산으로 이어지는 고지는 마산을 함락하려는 적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아군 모두 포기할 수 없는 요충지였다. 특히 서북산은 한 달 반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열아홉 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고 한다. 투입된 미군은 진동리지구 방어를 맡은 제25사단 예하 제5연대였다.

 서북산전적비는 당시 전사한 이 부대 소속 중대장 로버트 티몬스 대위를 비롯한 100여명의 넋을 기리는 기념비다.

1994년 8월 주한 미 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로버트 티몬스대위의 아들 리차드 티몬스 중장이 부임 이듬해인 1995년 11월 서북산 정상에 전적비를 세웠다. 이에 국가보훈처는 2013년 11월 이 전적비를 현충시설로 지정해 관리한다.

여항산 서쪽자락 여항면 주서리와 주동리는 귀촌인들의 전원주택이 많이 들어설 만큼 자연경관이 좋다. 여름 피서지로도 유명한 이곳 별천계곡 입구에도 여항산 일대 전투를 알리는 625격전함안민안비가 있다. 지역주민들이 뜻을 모아 1988년 1월 여항산 등산로 초입에 세웠던 기념비를 봉성저수지 확장공사에 따라 2009년 11월 이곳으로 옮겼다. 함안민안비 역시 현충시설로 지정돼 있다.

여항산과 서북산, 봉화산 능선을 빙 두르는 환상등산로와 산허리를 두르는 여항산둘레길은 빼어난 산세와 울창한 숲으로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다. 낙남정맥이 지나는 산길이기도 한 서북산에서 바라보는 남해바다의 조망도 일품이다. 이곳에서 남서쪽으로 시선을 향하면 해병대 김성은부대가 진동리지구전투 승전 직후 통영 방면으로 우회하려던 적군의 허를 찌른 통영반도가 바라보인다.

 

통영반도서 한국해병 최초 상륙작전

국도 14호선을 따라 통영으로 가다보면 죽림 신시가지를 지나 통영 시내로 들어가는 고갯마루에 해병대통영상륙작전 전적비와 기념관이 있다. 전적비는 관광명소개발계획에 따라 관광공사가 1980년 2월 건립했다. 통영시가 2011년 4월 준공한 기념관은 통영해병전우회가 수탁운영하고 있다. 이렇게 이곳에 전적비와 기념관을 건립해 기릴 만큼 통영은 625전쟁 때 해병대의 대표적인 승전 현장이다.

1950년 8월 초 낙동강전선 최남단 진동리지구에서 부산 진격을 저지당한 북한군은 거의 무방비상태에 있던 통영으로 방향을 돌렸다. 견내량 해협을 건너 거제도를 점령해 마산과 진해 해상을 봉쇄하기 위해서다.

북한군 제7사단 소속 1개 대대 650여명은 8월 15일 통영반도의 길목인 원문고개를 거쳐 순식간에 통영을 점령했다.

이 같은 긴박한 상황을 접한 해군참모총장은 16일 김성은부대에 즉시 거제도 서해안에 상륙해 거제도에 침투하려는 적을 격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부대원을 2척의 LST(상륙함)에 나눠 태우고 다음 날 새벽 통영~거제 해역에 있는 섬 지도에 도착한 김성은 부대장은 해군본부에 작전계획 변경을 요청했다. 적은 병력으로 거제도의 긴 서해안을 수비하는 소극적인 작전보다 통영반도로 바로 상륙해 적을 기습하는 게 더 낫다는 판단에서다. 역사적인 해병대통영상륙작전은 그렇게 시작됐다.

통영해안을 초계중이던 우리 해군함정의 지원을 받아 통영반도 동북단의 장평리에 상륙한 김성은부대는 이튿날 새벽 통영시가지를 바라보는 망일봉을 점령하고, 일부 병력을 원문고개로 진출시켜 적의 퇴로와 후속부대의 진입을 차단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인 8월 19일 새벽 총공격을 감행한 끝에 그날 오전 10시경 통영시가지를 완전 탈환했다.

이때 원문고개를 찾은 뉴욕헤럴드트리뷴지의 도쿄 특파원이었던 종군기자 마거릿 히긴스(여)가 통영작전을 알리는 기사에서 한국 해병은 귀신이라도 잡겠다(They might capture even the devil)라고 쓴 이후 귀신 잡는 해병이 한국 해병의 용맹성을 상징하는 말로 자리 잡게 된다.

통영에는 원문고개 전적비와 기념관 외에도 통영케이블카상부승강장의 미륵산 정상 방향에 설치된 통영상륙작전 전망대, 용남면 신거제대교 입구 통영타워 옆에 세워진 최초 상륙지 표지석, 용남면 두타사 내의 영원한 해병 기념비 등이 당시 해병대의 전공을 기념하고 희생된 호국선열의 넋을 기린다.

 

최춘환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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