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고3 수험생 시절, 나는 수시지원으로 수능 시험 전 대학에 합격한 덕분에 교내 도서실에서 책을 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긴장감이 마그마처럼 흐르기 시작한 수능 일주일 전부터는 나 또한 무거운 마음이 되어, 끼고 살던 가벼운 책은 넣어두고 두꺼운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뽑아 든 책의 제목은 ‘라스 만차스 통신’. 일본의 권위 있는 문학상 ‘일본판타지소설대상’ 제16회 대상 수상작이란 홍보 문구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표지 디자인 또한 읽고 싶은 마음에 불을 지폈다. 발치에서부터 몸을 향해 다가오는 끈적끈적한 괴물을 애써 무시하는 여자가 소파에 앉아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한 장의 모더니즘 화보 같았다. 매력적인 표지 뒤로 펼쳐지는 첫 장은 시작부터 기묘한 흙내를 풍기는 줄거리였다. 주인공의 가정은 의무적으로 괴생물을 부양하고 있었다. 살을 부대끼며 괴물과 함께 사는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책 속에 서술되는 ‘선주민의 기득권’이었다. 진득하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변이를 꼬집는 대목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주인공은 이후 누나를 위협하는 괴생물 가족을 무력으로 구제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쫓기듯 화산재가 눈처럼 내리는 마을의 허름한 회사에서 일하게 된다. 그곳에서 연인을 만나기도 하고 강압적인 멘토에 정신적으로 고통도 받는데 무엇보다 마을 음지에 잠복한 괴물에게 잡혀 피를 모조리 흡수당할 위협도 받는다. 그뿐이랴. 인간을 식물로 만들어버리는 대목에서는 주인공과 독자 할 것 없이 모두 아연실색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그 밖에도 어쩔 수 없는 사고로 겪는 불행의 모습은 이상하게도 어딘가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이 책을 접한 시기가 그런 미지의 두려움이 가득했던 학창 시절이었기 때문일까. 극도의 몰입감을 가지고 마지막 장에 다다를 수 있었다. 누구나 견뎌온 세월이 있고 때로는 그로테스크한 사건을 온몸으로 받으며 버텨야 했던 시절이 있기에, 마냥 불행을 찬양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삶에 밀접한 모습을 판타지로 그려낸 이 책에 끌렸던 것 같다.
궂은일조차 피하지 않고 밀고 나갈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나는 이 책이 그런 궂은일들을 승화시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을 보며 나 또한 이런 결의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고생과 역경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미래의 청사진을 그려 나간다면, 후회도 결과도 모두 나의 것이니 마음은 가벼울 것 같다. 내게 삶의 그로테스크를 보게 해준 이 책을 추천한다.
이철웅(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