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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향기

[문화의 향기]내 인생의 책 한 권-박경리의 <환상의 시기>


청탁받은 원고를 쓰기 위해 모니터 앞에 앉았다. 마감시간은 시시각각 다가오는데 생각이 막힌다. 잘 써지던 원고가 급체를 한 듯 도무지 풀리지 않는다. 물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이야기를 짜내기도 어렵다. 이쯤 되면 어찌할 줄 몰라 발광의 단계에 이른다. 한밤중에 몽유병 환자처럼 홀로 서성이기도 하고, 온갖 차를 마셔보기도 하지만 막힌 생각은 쉬이 뚫리지 않는다.

등단하고 초기에는 그런 일이 드물었다. 항상 쓰고 싶은 이야기가 심장 바로 옆 내 이야기 방에 준비돼 있었다. 생각이 막히는 증세는 첫 소설집을 낸 후 느닷없이 찾아왔다. 예전 글과는 달라야 하고 새로워야 했으니까. 쓰다보면 이게 아닌데 싶어서 식은땀이 나고 등골이 서늘해지곤 했다. 산속에 홀로 내팽개쳐져 이야기를 찾아야 하는 형벌을 받게 된 죄인처럼 고독하고 외로웠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발광하지 않는다. 생각을 억지로 짜내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책꽂이에서 박경리 선생의 <환상의 시기>를 뽑아든다. 20여 편의 단편 중 한 편을 골라서 다시 읽기 시작한다.

선생이 평생 안고 살아야 했던 깊은 슬픔과 비극적 고통이 어떻게 문학적으로 승화되었는지를 살피는 데 초기 단편 소설만한 것이 없다. 단편 흑흑백백의 혜숙, ‘불신시대의 진영, ‘암흑시대의 순영은 모두 6·25 때 남편을 잃었다. 남편의 부재로 인한 주인공들의 가장 역할의 고통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선생 자신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반딧불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남은 가족의 아픔에 대한 자전적 요소가 그대로 드러난다. 어머니를 버리고 집을 나간 아버지의 부재는 여성 억압에 대한 현실을 자각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면서 주인공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점점 더 차갑고 강인하게 변모해간다. 급기야 주인공 진영의 입을 빌어 그렇지, 내게는 아직 생명이 남아 있었다. 항거할 수 있는 생명이!”(‘불신시대’)라는 인식으로 나아간다. 여기서 생명이란, 타락한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자각이다. 생명은 타자의 마음을 열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이며, 현실의 속물성과 억압으로 인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다.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를 환상의 시기라 한 것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막힌 이야기가 두루마리 휴지처럼 술술 풀려나가게 마련이다.

 

하아무(본명:하정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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