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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의 소리

[도민의 소리]진주의 영원한 시인 고(故) 허수경 4주기를 추모하며

 

가을 햇살이 벼 이삭을 황금빛으로 물들일 때면 마주하게 되는 시인이 있다. 매일 밤 시 한 편씩 쓰면서 달빛처럼 서서히 스며들었던 시인 허수경. 그는 2018103일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고향이자 내가 사는 진주에는 시공간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 많아 꽤 충격이 컸던 소식이었다.

1964년 진주에서 태어나 경상대학교(현 경상국립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간 허수경 시인은 방송사 스크립터 생활 중 1987실천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다음 해 첫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를 발표해 1992년 두 번째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을 펴내며 주목받았다가 돌연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문학이 아닌 고대 근동 고고학 박사학위를 땄다. 왜 하필 독일에서 문학이 아닌 고고학을 선택했을까? 낯선 곳에서 고고학까지 섭렵해야 했던 일상은 어땠을까?

실제로 허 시인은 독일 유학 중 고고학 발굴 작업보다 쐐기문자, 라틴어, 고대 중국어와 수메르어 같은 고대어를 마주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자신의 선택으로 얻은 고통과 수고스러움은 어떤 의미였을지, 허수경 시인에 대해 알면 알수록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이 모든 것이 전부 시() 때문이었다는 고백을 듣기 전까지 말이다.

허수경은 늘 시에 대해 사유했다. 생각을 바꾸면 시의 또 다른 새로운 형식이 나올 거라 믿었다. 낯선 이국과 모래만 흩날리는 폐허의 공간에서 끝없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 문명 발굴 작업은 어쩌면 그의 시적 세계를 발굴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가 발굴한 새로운 시 역시 결국 모국어로 발화시켜야 하는데 그 간극은 어떻게 극복했을지, 몇 번이고 되묻고 싶은 지점이다.

요즘 필사 중인 산문집 <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는 허수경 시인의 시작(詩作) 노트로 구성된 유고집이다. 2011년부터 작고한 해인 2018415일까지 허 시인의 컴퓨터 안에 있던 글들을 엮었다. 상황을 알 수 없는 단상의 파편들, 일기처럼 내뱉은 독백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다듬고 정제된 시 보다 날 것의 시들이 오히려 많은 것들을 상상하게 한다. 곳곳에 고향과 고국, 사람들 그리고 막연히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도 묻어있다. 그렇게 언급되는 진주의 숨은 곳들이 내가 사는 곳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다.

시인 허수경이 아닌 인간 허수경을 마주하려 오늘도 난 그의 시를 필사한다. 그렇게라도 허수경 시인이 우리 곁에 영원히 머물렀으면 좋겠다.

 

김수희 명예기자(진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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