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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

[행복한 여행]풍경소리에 마음 짓는 소원성취 길 '겨울 지리산 칠암자 순례길'

 


 

지리산 주능선의 북쪽 삼정산(1156m)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칠암자 순례길은 말 그대로 모두 7개의 절집을 지나는 약 18㎞의 산길이다. 산사람이 아니라면 8시간 이상 걸리는 먼 길이다. 대가람 실상사를 기준해 목각탱화가 있는 약수암을 비롯해 삼불암, 문수암, 상무주암 등 작은 암자를 지난다. 당대 고승 109명이 안거한 영원사와 마지막 종착지 실상사까지 도반을 만나고 지리산을 담아오는 순례길이다.

 

칠암자 종주가 갈수록 인기를 끌고 있다. 무미건조한 산행에 싫증을 느낀 사람들이 다양한 암자를 만나고 느린 걸음으로 힐링할 수 있는 길을 선호하다 보니 안성맞춤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접근성도 좋고 산길도 잘 정비되어 있다. 민가와 그리 멀지 않아 위험 부담도 덜하다. 전 구간을 소화하기 부담스러울 경우 다양하게 코스를 잡을 수 있고 산행 도중에 암자 스님과 담소도 나눌 수 있는 등 신선한 체험도 가능해 이래저래 힐링 요소가 많다.

산행은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도솔암을 시작점으로 잡는다. 남원의 실상사에서 시작할 경우 산행 내내 오름길을 걸어야 한다. 도솔암에서 출발하면 두어 번의 오름 외엔 전반적으로 평지와 내림길이어서 조망의 즐거움은 물론 산행 피로도 줄일 수 있다.

차량을 가져간다면, 실상사 주차장에 두고 출발하는 것이 좋다. 도솔사 초입인 영원사 입구에 주차해도 되지만, 출발지로 돌아가 차량을 가져가기에는 실상사 쪽이 낫다. 실상사 주차장에서 순례길 출발점인 영원사 입구까지는 택시를 이용하면 된다. 실상사와 영원사를 오가는 택시는 많다. 도솔암이 오솔길로 이어진 깊은 산속에 있기 때문에 영원사 입구에서부터 산행이 시작된다. 영원사 입구~도솔암~영원사~상무주암~문수암~삼불암~약수암~실상사로 순례길은 이어진다.

 


청정도량 지나 선계(仙界)로

도솔암은 해발 1200m에 자리한 청정 도량이다. 서산대사의 제자인 청매스님이 머문 곳으로 유명하다. 조계종 종정을 지낸 혜암스님이 쓴 ‘도솔암’과 ‘삼소굴’ 친필 현판이 걸려 있는 유서 깊은 암자다. 마당 주변으로 노송과 산등성이가 병풍을 두르고 지리산 천왕봉 등 주봉들이 오롯이 내려앉아 마치 망망대해 일엽편주를 연상케 하는 명당이다.

도솔암에서 40여 분 내려가면 영원사다. 양지 바른 산비탈에 대가람의 위용이 넘쳐나는 영원사는 신라 고승 영원조사가 창건한 암자다. 한때 지리산 최고 가람을 자랑하며 휴정, 유정, 인오 등 고승 109명이 수행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봄여름이면 짙푸른 신록이 우람하고, 가을이면 형형색색 단풍이 별천지를 연출하는 아름다운 절집이기도 하다. 지금은 양정마을에서 임도를 따라 자동차로 단숨에 오를 수 있다. 그런데도 절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지리산 오지에 온 듯 착각할 정도로 고즈넉함을 간직한 해맑은 암자다.

해우소 앞에서 비탈길을 따라 1시간 정도 오르면 삼정산 능선 빗기재에 닿는다. 거북바위가 거친 숨을 달래준다. 이내 능선으로 조금 더 올라서면 아름드리 노송 사이로 바래봉과 만복대 그리고 노고단은 물론 반야봉까지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다가온다. 이 길 끝자락에 있는 상무주암까지는 산길의 진수를 보여준다. 융단을 걷듯 폭신한 오솔길에 흰 눈이라도 내릴라치면 마치 선계(仙界)로 들어가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숨 멎을 듯한 상무주암 동대 조망

상무주암 직전 전망바위에 서면 다시 지리산 주능선을 만난다. 노송 사이로 배시시 얼굴 내민 반야봉도 등 뒤에서 채근한다. 한숨 돌리며 시장기를 달래기에 더없이 좋은 전망대다. 이내 상무주암에 닿는다. 절집에는 늘 출입금지를 알리는 나무막대가 가로 쳐져 있지만 운 좋게 마당에 인기척이 있을 때 인사를 넣으면 현기스님이 반겨준다.

마당에는 삼층석탑이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다. 마치 항아리 속으로 빨려들 듯 햇살이 내리쬐는 천상의 명당이다. 스님의 기도터인 동대에 서면 거침없이 다가오는 지리산의 영봉들이 숨을 멎게 만든다. 이보다 더한 조망이 이 땅 어디에 있을까!

다시 방향을 틀어 북사면을 돌아 20여 분 내려가면 문수암을 만난다. 오랫동안 암자를 지키던 도봉스님은 연로해서 해인사로 돌아가셨다. 도봉스님의 보시는 유명하다. 누구든 대화를 나누고 손수 가꾼 먹거리를 일일이 나누어주는 덕에 문수암은 소통의 공간으로 더 알려져 있다. 노령에도 쩌렁거리는 목소리와 건강한 체구는 칠암자의 매력을 한층 더해주곤 했다.

홀로 선 문수암 해우소에는 작은 봉창이 있는데 바람이 넘나드는 풍경을 볼 수 있어 말 그대로 근심을 풀기에 제격이다. 문수암은 그래도 늘 고독의 암자다. 마치 부모님 홀로 계시는 고향집에 온 듯 아련한 그리움이 밀려오곤 한다. 흰 눈 내릴 때 문수암은 고독의 섬으로 가는 한 마리 기러기 같다. 문수암 옆 천인굴(1천명이 피난했다는 전설의 암굴)의 석간수는 천하제일 명수(明水)로 손색이 없다.

 

산중 암자 돌아 평지 대가람으로

그 그리움 두고 다시 비탈을 따라 30여 분 내려가면 삼불암에 닿는다. 원래 비구니 스님 거처였는데 얼마 전부터 젊은 범용 비구 스님이 들어와 새로운 활기를 찾고 있다. 산객들에게 과일과 음료 등을 무료로 대접하고 일일이 맞아 대화도 나누는 등 예전과 다른 암자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삼불암은 독특하게 유불선(儒佛仙)을 두루 모신 사당이 있어 이색적이다. 평안한 마당에 서서 마치 협곡 사이로 난 풍경을 훔쳐보듯 도마마을 쪽 조망을 보노라면 시시때때로 변하는 풍경에 매혹되기도 한다.

삼불암에서 계단을 내려오면 갈림길이다. 오른편은 도마마을로 향하고 왼편은 약수암과 실상사로 가는 길이다. 사면을 따라 오르면 다시 삼정산 능선 하부다. 좌우를 조망하며 내려가다 보면 이내 대숲 사이로 약수암을 만난다.

단출하게 자리한 약수암은 시원한 샘물이 유명하다. 목각탱화인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보물 제421호이고 전각도 고색창연한 모습 그대로여서 볼거리도 많다. 대숲을 지나는 바람소리만 들어도 계절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숲이 우렁차다.

다시 임도를 따라 가거나 중간 중간 나 있는 오른편 갈림길을 따라가면 실상사에 닿는다. 칠암자의 종착점이다. 실상사는 국보와 보물 등을 간직한 대가람이다. 산중이 아닌 평지에 자리한 독특한 사찰로도 유명하다. 요즘은 지리산생명공동체운동으로 친근하게 다가오는 마을절이 됐다.

7개의 암자를 아우르는 칠암자길은 종교적 색채가 짙을 수 있다. 하지만 종교가 아닌 색다른 감성과 기운을 느낀다. 고단한 산길이 아니라 마음을 비우는 여행길이고 몸이 온전히 살아나는 치유의 길이다. 사시사철 지리산의 준봉들을 만날 수 있고 스님의 지혜를 나누며 동행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보물길이다. 깊이 들지 않으나 진국 같은 지리산의 속내를 고스란히 담아올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산길이 어디 있으랴. 

새해에는 칠암자 순례길 따라 풍경소리 들으며 마음 지어보는 소원성취의 해이길 빌어본다. 

 

 

글·사진 이용호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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