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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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장군의 호국정신이 서려있는 역사의 현장 속으로 여행을 떠나자!
  • 임진왜란 관련 행사나 승첩지 등 여러분의 역사의 현장체험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공간입니다.
관음포 유허비 1 관음포 유허비 2

관음포 유허비

  • 주소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산125 
  • 전화번호
앞면에는 “유명수군도독조선국삼도통제사증의정부영의정시충무이공순신유허비(有明水軍都督朝鮮國三道統制使贈議政府領義政諡忠武李公舜臣遺墟碑)” 라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번역문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남해현에서 곧장 남쪽으로 20리에, 넘치는 바닷물이 빙 둘러 도는 곳이자, 전쟁에 필요한 배들이 출입하고 있는 그 땅을 이름하여 관음포라고 하는데, 이곳은 고(故) 삼도통제사 증 의정부영의정 이충무공이 순국한 곳이다. 공이 수군으로 바다에서 왜구를 크게 격파함으로써 바다에 왜놈이 쳐들어오지 못하게 된 지가 지금까지 230여 년이나 되는데, 공 자신은 날아오는 총알에 맞아 돌아가셨으니, 아! 임진년(1592 선조 25년)의 난은 우리 동방에 재앙이 드는 해였다. 이 때에는 충성스럽고 용기와 지혜가 있는 몇 사람이 우리 선조 임금을 도와서 중흥을 이루어 그들의 공이 모두 이종[彛鐘옛날 공신의 이름을 새겨 보관하여 오래 전한 일종의 제기]에 새겨지고, 역사에 기록되어 밝게 빛나고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공훈이 천지에 가득하고 명성이 중국에까지 알려져 밝게 빛나 우주를 흔들고 해와 별처럼 드높은 사람으로 말하자면 아낙네나 어린이 할 것 없이 모두가 한마디도 의논하지 않고 선뜻 이순신 장군을 으뜸으로 친다. 공은 벽촌의 나약하기만 한 군사로써 용기 넘치는 백만의 일본군을 맞아 굳세게 나라를 지켜내는 인물이 되었다. 이것은 장수양[張誰陽안녹산의 난을 막은 당나라 장수]과 같고, 물결을 가로질러 물 흐름을 끊고서 기발한 계책으로 싸워서 저 흉악한 무리를 패배시켜 모두 불타 없어지게 한 것은 주공 근[오나라 주유의 이름, 적벽대전에서 조조 함대를 불공격으로 대파함]과 같다. 적은 군사로써 많은 군사를 쳐서 앞으로 나아가자, 굳세게 항거하는 일본군이 없고, 위세만으로도 적이 떨며 복종하게 하여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 모든 일본군이 소문만 듣고도 도망치게 한 것은 악무목[岳武穆남송의 충신 금나라 군대를 물리침]과 같다. 천하를 다시 편안하게 만들어 위태로움을 돌려 태평하게 안정시켜 그 한 몸에 종묘와 국가의 운명이 달린 것은 곽분양[廓汾陽당의 명장 현종 때 안사의 난을 평정함], 이서평[李西平당의 명장 덕종때 주비의 난을 평정함]과 같다. 정성을 펴고 공정함을 펴서 몸이 다하도록 힘쓰고 애써서 덕과 위엄이 함께 빛나, 농민과 병졸까지도 모두 감복(感服)시키고 마침내는 몸 바쳐 싸울 작정을 한 것은 오직 제갈무후[諸葛武侯제갈량 촉한의 승상]만이 그와 같다. 무후가 죽은 것은 병 때문이었는데, 공이 죽은 것은 전사였다. 그러나 무후가 죽은 뒤엔 한나라의 종실이 위태롭게 되었지만, 공의 경우엔 비록 죽었지만 남은 공렬(功烈)의 은덕(恩德)을 입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직이 거기에 힘입고 있으니, 공은 여한이 없을 것이다. 공의 드높고 큰 공적과 충성은 윤음[倫音임금님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에서 찬양되었고, 염완[琰琬나라의 보물 그릇]에 밝게 빛나고, 태상[太常예조 소속의 시호를 내려주는 관직을 말하고, 맹부는 공신의 훈공을 기록하는 일을 맡아하던 관아]에 기록이 있고, 그 사적이 맹부[盟府서약의 서류를 넣어두는 창고]에 보관되어 있어, 학사대부(學士大夫)가 기리고 서술하는 가운데에 빛나고 빛나니, 진실로 다시 더 군소리를 첨가할 필요가 없다. 다만, 공의 공적은 사실 바다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호남의 수사로서 무공을 처음으로 떨친 데 대해서는 좌수영대첩비가 있고, 벽파의 싸움에서 적의 총칼을 막아 기호지방[畿湖地方경기도 및 황해도 남부와 충청남도 북부 지방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길이 안정시킨 데 대해서는 명량대첩비가 있으며, 삼도통제영에 있으면서 깃대를 세우고 병영을 건조하여 앉아서 평화와 안정을 거둔 데 대해서는 고성충렬사비가 있고, 순천의 충민사, 남해의 충렬사, 고금도의 탄보묘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적이 드러나게 새겨져 있어서 영원히 그 공적을 알리고 있다. 그런데 유독 용맹하게 싸우다 살신성인한 곳에 대해서는 그 사실을 드러내어 밝힌 글이 없다. 우리 성상[聖上순조를 가리킴] 32년 임진년(1832)은 선조께서 회복을 도모한 지 4주갑[周甲1주갑이 60년이므로 4주갑은 240주년째가 되는 해]이 되는 해이다. 성상이 임진년(1592)을 회고하면서 감회를 일으켜 충성하고 수고하여 공이 높은 모든 사당에 제사를 내릴 적에 공에게 그 은전이 제일 먼저 미쳤다. 이때 공의 8세손인 이항권이 실제로 공이 맡았던 벼슬을 하여 삼도 수군을 통제하였는데, 왕명을 받들어 이 땅에서 제물을 바쳐 제사하고, 단을 설치하여 신령이 강림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물러나와 여러 사람과 의논하여 큰 돌을 다듬어 그 터를 표시하고 새기어 드러내려 하니, 이를 본 사람들이 통제사가 자손 노릇을 옳게 잘하였다고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