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159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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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로 보는 이순신장군의 백의종군 행적!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1597년 4월 11일(신미, 5월 26일)

정유년 4월(1597년 4월)

정유년 4월(1597년 4월
1597년 4월 1일 (신유, 5월 16일) 맑다. 옥문을 나왔다. 남문(숭례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 이르니, 조카 봉ㆍ분과 아들 울이 윤사행ㆍ원경과 더불어 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지사 윤자신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가 와서 봤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밥을 먹은 뒤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윤기헌도 왔다. 이순신이 술병째로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며 위로해 주었다. 영의정 유성룡, 판부사 정탁, 판서 심희수, 이상(二相) 김명원, 참판 이정형, 대사헌 노직, 동지 최원, 동지 곽영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했다.
1597년 4월 2일 (임술, 5월 17일) 종일 비오다. 여러 조카들과 이야기했다. 방업이 음식을 매우 푸짐하게 차려왔다.
1597년 4월 3일 (계해, 5월 18일) 맑다. 일찍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금오랑 이사빈, 서리 이수영, 나장 한언향은 먼저 수원부에 이르렀다. 나는 인덕원(경기도 과천시 인덕원)에서 말을 먹이고 저물어서 수원에 들어가니, 신복룡이 우연히 수원에 왔다가 내 지나가는 걸 보고는 술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나를 위로했다. 수원부사 유영건이 나와서 봤다.
1597년 4월 4일 (갑자, 5월 19일) 맑다. 일찍 길을 떠나 독성(수원 성남 양산리) 아래에 이르니, 반자 조발이 술을 준비해 놓고 막을 치고 오산황천상의 집에서 기다렸다. 진위(북면 봉남리)를 거쳐서 이르렀는데, 황천상은 내 짐이 무겁다고 말을 내어 실어 보내니 고마울 뿐이다. 수탄을 거쳐 평택현 이낸손(李內隱孫)의 집에 투숙했는데, 대접이 매우 은근했다.
1597년 4월 5일 (을축, 5월 20일) 맑다. 해가 뜨자 길을 떠나 바로 선산에 이르러 절하며 곡하고 나서, 그 길로 조카 뇌의 집에 이르러 조상의 사당에 절하고 남양 아저씨가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1597년 4월 6일 (병인, 5월 21일) 맑다. 멀고 가까운 친척ㆍ친구들이모두 와서 모였다. 오랫동안 막혔던 정을 풀고 갔다.
1597년 4월 7일 (정묘, 5월 22일) 맑다. 금오랑(이사빈)이 아산현에서 오므로 나는 나가 그으기 대접했다. 홍찰방ㆍ이별좌ㆍ윤효원이 와서 봤다. 금오랑은 변흥백의 집에서 잤다.
1597년 4월 8일 (무진, 5월 23일) 맑다. 자리를 깔고 남양 아저씨를 곡하고 상복을 입었다. 저녁나절에 변흥백의 집에 이르러 도사를 접대했다.
1597년 4월 9일 (기사, 5월 24일) 맑다. 동네 사람들이 술병을 가지고 와서 멀리 가는 길을 위로해주므로 인정상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 마시니 매우 취해서 헤어졌다. 도사는 잘 마시면서도 실수함이 없다.
1597년 4월 10일 (경오, 5월 25일)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변흥백의 집에 가 도사와 함께 이야기했다.
1597년 4월 11일 (신미, 5월 26일) 맑다. 새벽꿈이 매우 번거로워 마음이 불안하다.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종일 보내어 소식을 듣고 오게 했다. 도사는 온양으로 돌아갔다.
1597년 4월 12일 (임신, 5월 27일) 맑다. 종 태문이 안흥량에서 들어와 편지를 전하는데, “초9일에 어머니와 위아래 모든 사람이 모두 무사히 안흥량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아들 울을 먼저 바닷가로 보냈다.
1597년 4월 13일 (계해, 5월 28일) 맑다. 일찍 아침을 먹음 뒤에 어머니를 마중가려고 바닷가로 가는 길에 홍찰방집에 잠깐 들러 이야기하는 동안 아들 울이 종 애수를 보내어 놓고 하는 말이, “아직 배 오는 소식이 없다”고 했다. 또 들으니, “황천상이 변흥백의 집에 왔다”고 한다. 홍찰방과 작별하고 변흥백의 집에 이르렀다. 조금 있으니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 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늘이 캄캄했다. 곧 해암(아산 인주면 해암리)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애통함을 다 적을 수가 없다.
1597년 4월 14일 (갑술, 5월 29일) 맑다. 홍찰방ㆍ이별좌가 들어와 곡하고 관을 장만하다. 관의 재목은 본영에서 마련해 가지고 온 것인데, 조금도 흠난 곳이 없다고 했다.
1597년 4월 15일 (을해, 5월 30일) 맑다. 저녁나절에 입관했다. 오종수가 진심으로 호상해 주니, 뼈가 가루 될지언정 잊지 못하겠다. 천안군수가 들어와 치행해 주고, 전경복씨가 연일 마음을 다하여 상복 만드는 일 등을 돌보아 주니, 고마운 말을 어찌 다 하랴!
1597년 4월 16일 (병자, 5월 31일) 궂은 비 오다. 배를 끌어 중방포 앞으로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니,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이야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집에 와서 빈소를 차렸다. 비는 퍼붓고 남쪽으로 갈 날은 다가오니, 호곡하며 다만 어서 죽었으면 할 따름이다. 천안군수가 돌아갔다.
1597년 4월 17일 (정축, 6월 1일) 맑다. 금오랑의 서리 이수영이 공주에 와서 가자고 다그쳤다.
1597년 4월 18일 (무인, 6월 2일) 종일 비오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다만 빈소 앞에서 곡만 하다가 종 금수의 집으로 물러 나왔다.
1597년 4월 19일 (기묘, 6월 3일) 맑다.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니 영전에 울며 하직했다. 천지에 나 같은 운명이 어디 또 있으랴! 일찍 죽느니만 못하다. 조카 뇌의 집에 이르러 먼저 조상의 사당에 아뢰고, 그길로 보산원(광덕면 보산원리)에 이르니 천안군수가 먼저 냇가에 와서 말에서 내려 쉬고 있었다. 임천군수 한술이 서울로 가던 중에 앞길을 지나다가 내가 간다는 말을 듣고 들어와 조문하고 갔다. 아들 회ㆍ면ㆍ봉, 조카해ㆍ분ㆍ완과 주부 변존서가 함께 천안까지 따라왔다. 원인남도 와서 보고 작별한 뒤에 말에 올랐다. 일신역(공장 장기면 신관리)에 이르러 잤다. 저녁에 비가 뿌렸다.
1597년 4월 20일 (경진, 6월 4일) 맑다. 아침에 공주 정천동에서 밥을 먹고 저녁에 니성(공주군 니성면 읍내리)에 가니, 이 고을 원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김덕장이 우연히 왔다가 서로 만났다. 도사가 와서 봤다.
1597년 4월 21일(신사, 6월 5일) 맑다. 일찍 떠나 은원(논산군 은진면 연서리)에 이르니 김익이 우연히 왔다고 한다. 임달영이 곡식을 사러 은진포로 왔다고 하는데, 그 꼴이 몹시 궤휼하다. 저녁에 여산(익산군 여산면) 관노의 집에서 자는데. 한밤에 홀로 앉았으니 비통한 생각에 견딜 수가 없다.
1597년 4월 22일(임오, 6월 6일) 맑다. 오전에 삼례역(익산군 삼례면)의 역리의 집에 이르렀다. 저녁에 전주 남문밖 이의신의 집에서 자다. 판관 박근이 와서 봤다. 부윤도 후하게 접대했다.
1597년 4월 23일(계미, 6월 7일) 맑다. 일찍 떠나 오원역(이실군 오천면 선천리)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었다. 저물어서 임실현에서 잤다. 임실현감이 예에 따라 대우했다. 현감은 홍언순이다.
1597년 4월 24일(갑신, 6월 8일) 맑다. 일찍 떠나 남원 십리 밖의 이희경의 종의 집에 이르렀다.
1597년 4월 25일(을유, 6월 9일) 비가 많이 올 듯하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길을 떠나 운봉(남원군 운봉면)의 박롱의 집에 들어가니, 비가 많이 퍼부어서 출두할 수가 없다. 여기서 들으니, “원수(권율)가 벌써 순천으로 떠났다”고 했다. 곧 사람을 금오랑 있는 곳으로 보내어 머물게 했다. 운봉현감(남간)은 병으로 나오지 않았다.
1597년 4월 26일 (병술, 6월 10일) 흐리고 개지 않았다. 일찍 아침밥을 먹고 길을 떠나 구례현 손인필의 집에 이르니, 구례현감(이원준)이 급히 나와 보고는 대접하는 것이 매우 은근하다. 금오랑(이사빈)도 와서 봤다.
1597년 4월 27일 (정해, 6월 11일) 맑다. 일찍 떠나 순천 송원(승주군 서면 학구리 신촌)에 이르니, 이득종ㆍ정선이 와서 기다렸다. 저녁에 정원명의 집에 이르니, 원수(권율)는 내가 온 것을 알고 군관 권승경을 보내어 조문하고 또 안부도 묻는데, 그 위로하는 말이 못내 간곡하다. 저녁에 순천부사가 와서 봤다. 정사준도 와서 원균의 망령되고 전도된 상황을 많이 말했다.
1597년 4월 28일 (무자, 6월 12일) 맑다. 아침에 원수가 또 군관 권승경을 보내어 문안하고, “상중에 몸이 피곤할 것이니 기운이 회복되는 대로 나오라”고 전했다. 또 말하기를, “통제사와 친한 군관이 있다 하니 편지와 공문을 보내어 나오게 하여 데리고 가서 돌보라”고 하는 편지와 공문을 만들어 왔다.
1597년 4월 29일 (기축, 6월 13일) 맑다. 신 사과(愼司果)와 방은원이 와서 봤다. 병사(이복남)도 원수와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하여 순천부로 들어왔다고 한다.
1597년 4월 30일(경인, 6월 14일) 아침에 흐리고 저물 무렵에 비오다. 병마사 이복남이 아침밥 먹기도 전에 와서 보고, 원균에 대한 일을 많이 말했다. 감사도 원수에게 왔다가 군관을 보내어 편지로 안부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