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해전이 일어나기까지의 조선의 정세

각 나라의 정세
  • 임진왜란 막바지에서 조선, 명, 일본은 각기 추구하는 목적이 달랐다. 조선은 일본 의 침략에 큰 아픔을 겪고 있었으며, 파병 온 명군의 행패로 멍이 들어 있었다.
    종전을 앞둔 명나라와 일본의 속셈과 피해자인 조선의 입장을 자세히 알아보자.

노량해전이 일어나기까지의 조선의 정세

노량해전이 일어나기 전 조선 진영의 정세를 알아보자.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패전함에 따라 수군이 없어질 지경에 이르렀으나 명량해전의 승리 이후 전선 건조에 힘을 쏟아 40여 척이 더 만들어졌다.
이순신 장군은 1598년 2월 17일 고금도를 본영으로 정하기까지 진을 여러 군데로 옮기며 전력을 다듬고 정비하였다.

고금도는 전라도의 안과 바깥 바다를 방어할 수 있는 요충지로 군비와 군사를 보완하는데 적합한 장소였다.
이때 수군의 수는 8천명이 되었으며 군량미를 조정의 도움 없이 해결하기 위해 해로통행첩 [海路通行牒바닷길을 통과해도 좋다는 증명서]을 발행하여 통행세를 받았다고 징비록에 쓰여 있다.
명량해전 이후 조선전선 이동경로 명량해전 이후 조선전선 이동경로
징비록 징비록
고금도에 수군기지를 설치한 후 판옥선의 수는 점차 늘어났다. 또한 1598년 7월 16일 조선 수군은 임진왜란 사상 처음으로 명나라 전선이 합류되어 조명연합전선[朝明聯合戰船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수군]이 구성되었다.


1598년 10월 12일 선조실록에 의하면 명나라 군사는 1만 9,400명이고, 조선 수군은 7,328명이라 하였다.
이는 배 한 척 당 정원을 125명으로 생각하면 노량해전에는 80여 척의 전선이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연합전선이 편성되었어도 명나라 군은 조선의 장수와 군사를 마음대로 하였고, 그 횡포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한편, 이순신 장군은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둔전[屯田주둔하는 군사들의 군량을 자급하기 위하여 마련되어 있는 밭]을 경작하였고, 염전에서 소금도 생산하여 팔았다.
1598년 이순신 장군 해전도 1598년 이순신 장군 해전도
이순신 장군이 해로통행첩(海路通行牒) 발행과 둔전을 경작한 이유를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