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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경남역사

[아하! 경남역사]가야유산 기획❿ 잊힌 소가야의 흔적, 진주 가좌동 고분군

 


가야시대의 대표적인 고분군은 전기가야(1~4세기)의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후기가야(5~6세기)의 맹주였던 대가야의 고령 지산동 고분군, 아라가야의 함안 말이산 고분군이다. 그리고 고성을 기반으로 번성한 소가야는 삼국유사를 남긴 저자가 인식한 당시의 시대 상황과 함께 개인이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정리되고 있다. 그렇다면 서부경남에서 확인되는 수많은 가야고분은 어떤 가야의 이야기를 담고있는 것일까.

 

가좌동 고분군, 소가야를 말하다

진주지역과 관련된 문헌기록이 최초로 확인되는 시기는 삼한시대, 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진조에 나온다. 이 지역은 변한 12국 중 하나였던 고순시국(古淳是國)’ 또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다섯 가야 중 고령가야(古寧伽耶)’의 고도로 추정된다. 최근에는 남해안 거점 해상세력인 포상팔국(蒲上八國)’과의 관련성도 언급된다.

진주의 가야시대 고분군은 60여 곳이다. 진주는 고대로부터 교통의 요충지이다. 지금 진주는 서부경남의 거점도시이자 산업과 교육 인프라의 결절점이기도 하다. 가좌동 고분군은 소가야의 고지인 고성의 송학동 고분군과 또 다른 소가야 세력의 일원으로 알려진 서부경남 최대의 고분군인 산청 중촌리 고분군과 합천 삼가 고분군의 중간에 자리하고 있다.

가좌동 고분군은 일제강점기의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처음 소개된 이래 문화유적총람에도 나온다. 옛 개양역 남쪽 야산의 정상부에 여러 기의 고총고분(高塚古墳 : 봉분을 크고 높게 쌓은 무덤)과 주변에 수많은 돌덧널무덤(石槨墓)이 있다. 특히 구릉의 동쪽을 중심으로 7기의 고총고분이 눈에 띄는데 안타깝게도 심하게 훼손됐다.

1988년 국립경상대학교 박물관의 수습조사 이후, 지난 2016년 신진주역세권 개발 사업에서 그 전모가 드러났다. 두 차례의 발굴조사에서 90여 기의 돌덧널무덤, 다수의 돌방무덤(石室墓) 등이 확인됐다. 특히 하나의 봉분에 여러 기의 돌덧널무덤을 함께 만든 형태는 고성, 산청, 합천에서 나온 전형적인 소가야의 무덤구조와 닮았다.

 

철제 무기와 말갖춤을 소유한 지배자들의 무덤

가좌동 고분군은 가야 묘제(墓制)의 변천과정 속에서 제국으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규모가 큰 돌덧널무덤에서는 큰칼(大刀)이 발굴되는데 무덤 주인공은 대부분 무사집단일 가능성이 크다. 가좌동 고분군에서 가장 큰 2구간 1호분은 총 47점의 유물이 부장된 최고지배자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무덤 축조과정에 나무기둥(木柱)을 사용한 흔적이 확인되었고, 세잎고리자루큰칼(三葉文環頭大刀)과 발걸이(鐙子), 재갈(), 띠고리(鉸具) 등 각종 말갖춤은 무덤 주인공의 위계와 성격을 뒷받침한다. 이는 최근 소가야의 대표 고분군으로 알려진 합천 삼가 고분군 최상위 지배자의 무덤인 M3-1호분과 맞먹는 수준이다. 서부경남에서 가야고분의 발굴조사와 연구가 더 진행되면 이 일대 가야제국의 모습을 선명히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사라진 경관과 남겨진 가야는 어떡할까?

가야사 연구복원이 국정과제로 추진되면서 고총고분 위주의 조사연구와 복원정비 사업이 연일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러한 접근방법과 경향은 문헌기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가야사를 정립하는 데 어쩔 수 없는 선택이며 분위기인 것이다. 고총고분을 조성한 가야의 세력들은 문헌기록에 남겨진 이름으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가야의 세력을 웅변하는 수많은 중소형 고분들은 발굴기록으로만 남겨진 채 빌딩숲이나 공장에 밀려나고 있다. 지금 가야의 땅에 살면서도 이런 현실을 방관한다면 베일에 싸인 작은 가야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듣겠다는 것인지 반문하고 싶다. 

 

여창현 남해군청 학예연구사  사진제공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경상문화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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