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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특집]가야유산 기획❾ 작은(小) 가야? 쇠(鐵)가야!

작성2019년 07월[Vol.76] 조회404

  


소가야에 대한 오해

우리는 가야(加耶)를 통일되지 못한 여섯 개의 작은 나라들의 연맹으로 배워왔다. 김해 금관가야, 함안 아라가야, 경북 고령 대가야가 가야사를 대표하는 것으로 여 긴다.

필자가 살고 있는 경남 고성은 고대 소가야의 중심지로서 무덤유적인 송학동 고분군(사적 제119호)과 내산리 고분군(사적 제120호), 생활유적인 동외동 패총(경상남도 기념물 제26호) 등 다른 가야지역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유적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도 ‘작을 소(小)’ 자 때문인지 ‘작은 가야’로만 생각하는 것 같다. 심지어 낮은 수준의 문화를 가졌던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소가야는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었고 문화 수준 역시 저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가야는 해상왕국으로서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연결하는 대외교역 항구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었다는 사실들이 속속 발굴되고 있다.

 

‘작은 가야’가 아닌 ‘쇠(鐵)가야’

소가야는 다양한 이름으로 등장한다. 3세기 변한의 열두 나라 중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으로, 가라국과 대적한 남해안의 여덟 나라(浦上八國) 가운데 고사포국(古史浦國), 고자국(古自國)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바다로 돌출한 육지를 의미하는 ‘곶(串)’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은 역시 삼국유사(三國遺事) 오가야조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작을 소’자의 소가야(小伽耶)이다. 과연 가야시대 고성 사람들도 정말 ‘작음’을 의미하는 소가야라 불렀을까? 실제 소가야 문화권은 진주, 산청, 합천(남부) 등지로 넓게 분포돼 있었다. 결코 작은 나라가 절대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소가야의 진실은 무엇일까? 소가야를 ‘쇠가야’로 설명하는 가야사 전문가도 있다. ‘소가야’는 ‘쇠가야’ 곧 ‘철(鐵)의 가야’라는 주장이다. 고성읍의 옛 이름이 철성면(鐵城面)이었고, 지금도 철성고등학교가 있다는 점에서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실제 고성의 가야유적 학술조사에서 철과 관련된 자료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지난 1970년대 동외동 패총에서는 가야시대 철을 생산하던 야철지(冶鐵址)가 이미 발굴됐다. 또 지난해 고성군에서 실시한 정밀지표조사에서도 철을 생산하던 화로 조각들과 철 찌꺼기가 다량 채집되어 대규모 제철유적의 존재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가야 후기의 대외교역 항구, 고성

송학동 고분군은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 대상’에도 포함된 소가야 대표 유적이다. 고성읍 한가운데에 있는 송학동 고분군은 총 14기의 대형 고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낙타 등을 닮은 1호분에서 소가야 고분만의 독특한 구조가 밝혀졌다. 다른 가야고분과는 달리 봉분을 먼저 쌓고 그 위를 파서 무덤을 조성하는 이른바 분구묘(墳丘墓) 방식이다. 또 하나의 봉분에 무덤 여러 개를 배치하는 다곽식(多槨式) 고분도 발견됐다. 1호분 3기의 큰 무덤 중 두 번째로 만들어진 1B-1호분이 주목받고 있다. 이는 6세기 무렵 조성된 돌방무덤(石室墓)으로, 일본 북부큐슈(北九州)의 그것과 비슷한 구조로 밝혀졌다. 돌방 내부에는 벽사(辟邪: 사악함을 물리침)와 부활을 의미하는 붉은 칠이 되어 있다.

또 넓은 아가리를 가진 구멍항아리와 조개장식 말띠꾸미개 등은 소가야와 일본열도의 문화교류를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다. 이는 5세기 금관가야(가락국)가 누렸던 대외교역 항구가 고성 중심의 소(쇠)가야로 옮겨왔음을 의미한다. 소가야가 남해안을 무대로 거대한 해상왕국으로 성장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성군에서는 소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규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해 동외동 패총, 철마산성을 조사했고 올해는 소가야 핵심유적의 방어시설로 추정되는 만림산토성과 남산토성에 대한 정밀지표조사를 실시해 학술적 성과를 올렸다. 앞으로 밝혀야 할 소가야 이야기가 많겠지만 철의 나라이자 해상왕국으로서 제대로 평가받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병윤 고성군청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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