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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경남역사

[아하! 경남역사]가야유산 기획⓰ 가야의 칼, 왕국을 지배하다

 



큰 칼에 용과 봉황을 새기다

지난해 화려한 금빛을 품은 큰칼 4점이 우리나라 보물 제2042호로 지정됐다. 주인을 알 수 없는 옥전 M3호분에서 출토됐다. 가야의 왕국, 다라국의 지배층 묘역으로 알려진 합천 옥전고분군에서 1500여 년을 기다려 온 가야의 유물이다.

보물로 지정된 큰칼은 고리가 달린 손잡이에 용과 봉황이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뛰어난 조형미는 우리나라 금속공예의 걸작으로 꼽히며, 가야 고고학을 넘어 동아시아 고대사 연구자들이 일찍부터 주목한 유물이다. 1987년 국립경상대학교 박물관이 세상에 공개한 지 30년이 지나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수많은 유물 가운데 가야 왕국을 지배한 힘은 이 용봉문 고리자루 큰칼에 숨겨져 있지 않을까. 황금빛 큰칼을 차고 철갑옷을 두른 가야 왕의 위용을 그려볼 수 있다.

 

가야 왕의 칼, 권위의 상징

삼국시대 고분에서는 다양한 장식의 큰칼이 출토됐다. 쇠로 만든 칼은 2000여 년 전, 가야의 모태가 되는 변한의 나무널무덤에서 처음 확인된다. 단순한 형태의 짧은 칼은 이후 가야는 물론 삼국의 지배자를 상징하는 큰칼로 권위가 상승하게 된다.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큰칼처럼 용과 봉황을 새겨 최고지배자인 왕을 상징한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용봉문 고리자루 큰칼은 50여 점 정도. 지난 1918년 창녕 교동 고분군에서 용봉문 큰칼이 처음으로 발굴됐다. 20년 뒤에는 고령 대가야의 지산동 고분군 39호분(금림왕릉)에서도 용의 모습이 선명한 큰칼이 출토됐다.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용봉문 큰칼은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이러한 이유로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용봉문 큰칼이 국내외 박물관에 다수 소장되어 있다.

용봉문 큰칼은 함안 말이산 고분군 54호분과 창녕 교동 고분군의 10호분, 그리고 필자가 15년 전 직접 노출한 산청 생초 고분군의 M13호분 등에서도 나왔다.

용봉문 큰칼의 역사적 가치는 중국과 주변 나라 사이에 맺어진 책봉체제를 보여준다.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용봉문 큰칼의 계통은 백제나 중국 남조에서 만들어져 가야 왕에게 전달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최근에는 가야에서 자체 제작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러한 가야의 용봉문 큰칼은 경주(식리총, 호우총), 나주(신촌리 9호 을관)에서도 출토되면서 가야 왕국의 적극적인 대외교류를 증명하고 있다.

 

가야 전사, 삼국의 전쟁에 나아가다

용과 봉황이 새겨진 큰칼을 소유한 가야 왕의 군대는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가야의 무장체계는 필자가 복원하고자 하는 오래된 연구 주제이다. ‘철의 왕국가야에서 출토된 철제 무기는 압도적인 수량을 차지한다. 현재까지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가야 고분군은 112개소. 학계에 보고된 가야 고분 8300여 기 가운데 무기는 2100여 기에서 나왔다. 4명 가운데 1명이 무기를 소지한 가야 사회에서 주력 무기는 투겁창과 화살촉이었다.

가야 전사의 강력한 전투력은 철갑옷을 입은 상대를 찌르는 투겁창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개마무사의 기본 무기이며, 밀집대형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전술이 가능했다. 가야 고분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는 무기는 화살촉으로 원거리에 있는 적을 공격했을 것이다.

AD 400년 가야는 동북아 최강의 고구려 광개토왕 군대와 격돌한다. 결과는 참담한 패배로 이어졌으나, 이후 새로운 변혁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신라 소지마립간 3(481) 포항 영일만 일대까지 내려온 고구려 군대에 맞서 가야는 백제와 함께 신라를 구원한다. 이후에도 백제 성왕의 한강 유역 회복전이 있었던 551년에도 가야군은 신라와 함께 참전했다. 백제와 신라의 운명적인 결전인 관산성 전투에도 원군을 파견한 가야는 삼국과 나란히 전란의 시대를 보냈다.

이러한 가야의 후예, 신라 장군 김유신은 삼국 통일전쟁을 주도하면서 우리나라 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장상갑 의령군 의병박물관 학예연구사  사진 국립경상대학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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