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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경남역사

[아하! 경남역사]가야유산 기획㉖ 가야고분에 묻힌 로만글라스

 


19917월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옥전고분군의 네 번째 발굴조사가 경상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시작됐다. 이때는 지름 20m 대형 봉토를 갖춘 M1호분과 M4호분 등이 대상이었고, 필자는 M1호분 조사를 맡았다. M1호분은 이미 두 번째 발굴조사 때 조사하려 했지만, 원로 학자들의 권고에 따라 다음 기회로 미뤄졌었다.



도굴, 후회 그리고 발굴

그런데 1991년 봄 M1호분이 도굴범들에 의해 무참하게 훼손되고 말았다. 옥전고분군이 세계유산등재 대상으로 거론되고, 1987년 두 번째 발굴조사 때 M3호분에서 왕과 왕족의 무덤에서만 발견되는 유물들이 쏟아지면서 옥전고분군의 남은 고분들이 도굴범들의 표적이 된 결과였다.

우리는 과거 발굴조사를 중단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주인공이 묻힌 중심 곽의 중앙부가 집중적으로 도굴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땅을 칠 수밖에 없었다. 후회와 안타까움을 뒤로한 채 M1호분의 매장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주인공의 발치 쪽에서 허리띠 장식과 말갖춤 3세트, 철제 말갑옷과 말투구 등 최고급 유물들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가야고분에서 로만글라스를 찾다

그러던 어느 날 필자의 눈을 의심케 하는 물건(?)이 드러났다. 발치 쪽에서 삼각형의 조그마한 유리조각을 발견했다. 필자는 너무 놀라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가야고분에 웬 유리조각인가? 도굴범들이 버린 음료수 병 조각인가? 아니면 M1호분의 도굴구덩이에서 확인된 일제강점기의 유리병 조각 같은 것인가? 별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당시까지 가야고분에서는 고대의 유리용기가 나오지 않았다. 이를 본 적도, 만져본 적도 없었던 필자로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굴장소와 전혀 다른 곳에서 나왔다는 확신이 들자 곧바로 교수님께 알렸다. 교수님 역시 무척 놀란 표정으로 곧장 유리조각을 관찰하시고는 유리용기인 로만글라스(Roman glass)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유리조각은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다.

첫 발굴자인 필자로서는 유리조각이 로만글라스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렸다. 혹시 유리조각 근처 말갑옷에 나머지 조각이 있지 않을까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말갑옷을 출토상태 그대로 통째로 떠서 박물관으로 가져갔다.

이후 말갑옷을 감싼 우레탄 폼과 화선지를 하나씩 제거하면서 조심스럽게 흙을 털어냈다. 그러던 어느 날 환호성이 박물관 전체에 울려 퍼졌다. 푸른색의 반점문이 장식된 로만글라스가 깨어진 채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환호성과 흥분도 잠시 우리는 로만글라스 조각 하나 하나를 씻고 말려 붙였더니 담녹색을 띠는 반구형 몸체에 아래 위 2단으로 푸른색의 반점문이 장식된 완벽한 로만글라스가 드러났다. 1500년 전 가야고분에 묻혔던 로만글라스가 세상의 빛을 다시 보는 순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 품에 안긴 옥전고분군의 로만글라스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가야실에 전시돼 있다. 로만글라스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경남을 중심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고대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귀중한 고고자료로서, 지금도 당당한 모습을 뽐내고 있다.

옥전 M1호분 로만글라스 출토 모습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전시도록 / 1991년 7월 M1호분 발굴당시 모습

 

 

로만글라스(Roman glass)?

기원전 2000년 이전부터 인간이 유리를 발명했다. 대량 생산은 기원 전·후로 동지중해 지역에서 대롱 불기라는 획기적인 기술이 개발되면서 가능해졌다.

특히 로마제국의 확장과 함께 세계로 전파됐는데, 이러한 유리용기를 로만글라스로 부른다.

가야고분에서는 단 2점이 전부. 김해 대성동(91호분)의 푸른색 로만글라스 손잡이 조각은 4세기 금관가야, 옥전 M1호분 로만글라스는 5세기 후기가야(다라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류창환 극동문화재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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