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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칼럼] 혼돈··· 그만 죽고 말았다.

산방(山房)으로 향하는 길에는 가을이 깊다. 나지막한 산허리를 돌아가는 길마다 산국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길이라기보다 내가 밟고 지나가니 길이다. 그 길 끝자락에 덩그러니 서서 날 기다리는 현문산방은 내가 존경하는 교수님의 작은 오두막이다.

처음, 운문산 산자락에 지어진 이곳을 찾을 때만 해도 근사한 황토집이나 통나무집을 상상했었다. 교수님께서 주말마다 가서 책을 보거나 쉬었다가 오는 곳이라 늘 자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어설픈 상상력은 여지없이 깨어졌다.

흙으로 이겨 쌓은 벽은 곧 허물어질 듯 퍼석거리고 폐가에서 얻어다 단 옛날 문짝은 닫히지도 않고 대롱대롱 걸려 삐거덕거렸다. 낡은 창호지 사이로 하늘이 빼꼼 보이는 방은 네 명 정도 누우면 발 딛을 틈조차 없을 만큼 작았다. 그 흔한 TV도 없었다. 방에는 먼지 쌓인 찻잔과 몇 권의 책이 전부다. 부엌의 지붕은 억새로 엮어 이어 비나 겨우 피할 정도인데다가 아궁이에는 얻어다 걸어둔 무쇠 솥이 덩그러니 앉아있을 뿐이었다. 물도 없으니 마실 생수 두어 병은 챙겨가야 하는 이곳은 씻을 곳조차 마땅히 없었다. 이것이 산방의 모두다. 무엇하나 있는 것이 없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곳이다. 게다가 휴대전화조차 길을 잃게 하는 곳이다.

그러나 어둠이 내려앉다가 그려둔 불그레한 하늘빛과 마주치거나, 새벽 자욱한 안개를 이불마냥 덮고 있는 산자락을 보노라면 이곳을 다시 찾을 수밖에 없다. 문화라고는 닿지 않은 산방에서 잃어버린 자연을 찾아내면 나의 복잡한 머리는 맑아지고 무거운 가슴은 텅 비게 된다. 이곳 산방에서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무엇을 가지지 않아도 부자가 된다. 빔은 자연이 나에게 가르쳐준 풍요로움임을 알게 된다.

그런 까닭일까? 산방의 흙냄새 나는 방에 앉아있으면 『장자』내편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 실려 있는 재미있는 우화가 생각난다.

옛날에 남쪽 바다를 다스리는 ‘숙(儵)’이라는 임금과 북쪽 바다를 다스리는 ‘홀(忽)’이라는 임금, 그리고 중앙을 다스리는 ‘혼돈(混沌)’이라는 임금이 있었다. 숙과 홀은 언제나 혼돈의 땅에서 서로 만났는데 혼돈은 숙과 홀을 위하여 융숭한 대접을 하였다. 그래서 숙과 홀은 혼돈의 은혜에 보답할 의논을 하였다. “인간은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으로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혼돈만이 그것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니 그에게 구멍을 뚫어 주자” 이렇게 합의하고 혼돈에게 하루에 하나씩 구멍을 뚫어 주었는데, 이레째가 되는 날 혼돈은 그만 죽고 말았다.

아마도 장자가 우리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결론이지 않을까 한다. 인간의 영리함이 문명을 발달시키고 온갖 물질적 가치가 풍요로움을 만들어 내어 편리하고 즐거운 삶을 영위하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에는 우리의 참다운 본성은 사라지고 자연의 생명을 죽게 만들 것이라고 장자는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밝은 남쪽의 숙(儵)도 어두운 북쪽의 홀(忽)도 ‘빠름’을 뜻하는데 사물이 재빨리 나타나는 모양이 숙이라면 사물이 재빨리 사라지는 모양은 홀이다. 그렇다면 혼돈(混沌)은 남쪽과 북쪽의 지리적 중간이면서 남도 북도 구별 없는 공간이자,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다. 숙과 홀이 인위적인 문명의 상태라면 혼돈은 분화가 되기 전의 원질의 상태이다. 모든 사물이 확실히 구별되지 않은 상태인 혼돈이야말로 인위적인 차별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며 그것은 비어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릇이 비어있어야 담을 수 있는 단순한 진리를 혼돈은 죽음으로 ‘가운데(중(中))의 빔(충(沖))’의 지혜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혼돈의 다른 표현이 자연(自然)이며 혼돈의 다른 표현이 도(道)이다.

사실, 현대의 온갖 발달 된 통신수단들이 우리를 노예로 부리고 있다. ‘빠름빠름빠름’을 광고하는 스마트폰은 밥을 먹을 때도 강의를 들을 때도 화장실을 갈 때도 도대체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다. 모르는 것도 없어 물으면 묻는 대로 답을 척척 한다. 날씨도 게임도 소소한 연예계 이야기도 술술 풀어놓는다. 친구들과 한꺼번에 동시에 이야기하게 해 줄 뿐만아니라 찍는 사진마다 동시에 같이 보고 같이 공유하게 하니 조그마한 물건 하나가 해내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빠르게 빠르게만 살아가는 우리가 넘치고 넘치게 가지고 있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때로는 빠름이 도리어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가득 채워진 물건들과 넘쳐나는 정보들이 우리를 분쟁으로 내몰고 있다. 분석하고 나누고 논리적으로 파악하다가 보아야 할 진실을 놓칠 때가 많은 지금, 혼돈의 죽음에서 구별하는 지혜를 넘어 꿰뚫는 지혜를 배워야 할 때가 아닐까 한다.

물론 현대의 문명이나 편리를 무시할 수는 없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옳은 것이 아니며 모두 도만 닦자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있지만, 스마트폰을 줄일 줄 아는 자제력이 필요하다. 아는 것이 많지만 자랑하여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자리를 비워두고, 때로는 느린 걸음으로 산길을 걷다가 하늘을 보고 하늘을 닮고 싶어지는 여유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나아가, 진보냐 보수냐 좌익이냐 우익이냐 편을 가르고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전부를 아우를 줄 아는 정치가의 지혜로움 또한 필요한 때이다.

바쁜 일상을 가끔은 내려놓고 비우는 연습을 하기 위해 나는 산방을 찾는다. 이르게 찾아 온 산방의 가을이 뿌려 둔 낙엽을 푹푹 밟으며 나는, 나도 아닌 자연도 아닌 채 그냥 그대로 걷기만 한다. 천천히. 또 천천히.


* 위 내용은 칼럼니스트 개인 견해이며 경남이야기와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칼럼] 혼돈··· 그만 죽고 말았다. 저작물은 자유이용을 불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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