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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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무로마치(室町) 막부의 제3대 쇼오군(將軍)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가 1392년(조선 태조 1)에 남북조의 분열현상을 종식시키고 일본 전국의 지배전을 장악한 이후로 봉건제도가 발전하여 지방의 슈고 다이묘(守護大名) 집단의 세력이 신장됨으로써 지방분권의 추세가 촉진되었다.

15세기 중엽 무로마치 막부는 봉건 영주세력에 대한 쇼오군의 통제력이 약화되어 지방의 봉건영주인 슈고다이묘들의 분열을 초래하였으며, 1467년의 ‘응인(應仁)의 난(亂)’을 고비로 무로마치 막부가 사실상 몰락하고 그로부터 1백여 년에 걸쳐 각지에서 군웅이 할거하는 이른바 전국시대(戰國時代)를 열게 되었다.
이 전국시대의 혼란을 통하여 지방의 토착호족 출신의 신흥 무사집단이 등장하여 구세력인 슈고 다이묘 집단을 무력으로 꺾고 무로마치 막부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 반독립 국가로서 자립태세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일본 : 전국시대 실권장악 (오다 노부나가)1590년 일본전국통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다이묘의 무력집단 견제와 지지기반확보를 위한 해외원정모색

무력으로 대호족(大豪族)의 지위를 확보한 전국대명(戰國大名)들은 부국강병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경쟁적으로 강력한 무력집단인 가신단(家臣團)을 육성하여 세력 확장을 꾀하였으며, 일본 천하를 통일하여 전국의 영주들을 호령해 보고자 하는 야망까지 품게 되기도 하였다. 즉 전국대명의 일원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1568년에 실권을 장악한 뒤, 적대세력을 타도하고 전국 통일의 꿈을 실현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오다는 통일사업을 추진하던 도중인 1582년에 그의 부장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에게 피살당하고 말았다. 이에 오다의 부장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아케치를 응징하고 오다의 후계자로서 오사카(大阪)를 중심으로 통일사업을 계속하여 1590년에 마침내 일본 전국을 통일하였다.

도요토미는 일본의 통일사업을 추진해 나가는 과정에서 1585년에 간바쿠(關白)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다조다이진(太政大臣)의 지위에 올라 천황의 권위를 빌어 전국을 통치하였다. 도요토미는 상공업을 육성하고, 토지조사를 실시하여 경작제도를 개선하는 등 개혁정책을 단행하여 그가 실권을 장악한 지 10년이 채 못되는 짧은 기간 동안에 명실상부한 일본의 최고 실력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도요토미는 빈한한 농민 출신으로서 일약 일본의 최고 권력자로 급성장한 까닭에 뿌리 깊은 전통을 지닌 가신(家臣)집단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통일 정권은 다이묘 세력들을 일시적으로 결합시켜 놓은 일종의 연합 정권에 불과하였다.
이에 도요토미는 그의 정권기반에 내재되어 있는 취약점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봉건적 지배구조를 재편하여 다이묘 집단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대규모의 해외 원정 사업을 벌이고 여기에 봉건 다이묘의 무력 집단을 투입하여, 그들의 전투력을 소멸시킴으로써 그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획책하였다. 이러한 책략에는 정복지역의 광대한 영토를 다이묘세력에게 재분배하여 그들의 영지 확장 욕구를 충족시켜 줌으로써 다이묘 세력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도요토미명나라를 정벌하여 중국 대륙을 일본 영토에 편입시키겠다고 호언하면서 그 망상을 실천에 옮기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