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15세기 중엽,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주종적 군사 지배체제가 일반화되었으며, 전투의 양상도 대규모의 집단 보병 전술양상으로 전환되어, 전투의 주체도 무예가 뛰어난 소수의 기사(騎士)로부터 보병의 밀집부대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전투 방식의 변화는 무로마치 막부 말기부터 축성술의 발달과 조총의 전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시가루(足輕)라는 새로운 병종이 출현하여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 후, 아시가루는 16세기 중엽에 조총과 화약이 전래된 이후부터는 상비군으로 편입되어 그 지휘관인 아시가루 대장(足輕大將) 휘하에서 조총을 휴대한 데뽀조(鐵確組)와 활을 휴대한 궁조(弓組)로 전투시 공격의 주역이 되었다.

한편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의 군사체제는 일대 혁신을 이룩하였다. 도요토미는 중앙집권적인 군사 지휘체제의 확립을 위하여 다이꼬 겐지(太閤檢地)라는 토지 면적 및 양곡 수확고 조사사업을 실시하고 이 양곡 총량을 병력동원의 기준으로 삼아 1만 석 당 병력동원 한도를 250인으로 규정하였다.
임진왜란 일본인 그림

또한 전투부대의 편제도 개편하여 병종을 기병과 보병 두 가지로 구분하여 총지휘관인 시대장(侍大將)의 지휘하에 다수의 조로 구성된 기병ㆍ총병ㆍ궁병ㆍ창검병의 단위대를 편성하고 다시 각조에는 조두(組頭)라 부르는 기사(騎士)ㆍ보사(步士) 등 하급 지휘관을 두었다.

당시 일본군의 기본 전법은 전투부대를 3진 내지 4진으로 구분하여 기사가 지휘하는 기병인 제1진이 기치(旗幟)를 가지고 적진에서 2개 대로 분열하여 적을 포위할 태세를 갖추면 총병인 제2진이 적의 정면으로 진출하여 조총을 보면서 돌격을 감행하고, 그 뒤를 이어 궁병인 제3진이 진격하고, 최후로 제4진의 창검병이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일본군의 면모를 쇄신한 도요토미는 이를 배경으로 해외정복의 야욕을 품고 1586년경부터 방대한 선박 건조 계획을 수립하고, 각 제후에게 녹봉의 액수에 따라 차등을 두어 선박을 건조하게 함으로써, 임진왜란 개전 직전에는 1천여 척의 전선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전쟁 말기에는 3천여 척의 선단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도요토미는 조선 침공에 앞서 군량 확보 계획을 수립하고 개전 2년 전인 1590년부터 각 제후들에게 출정부대의 군량을 준비하도록 명령하는 한편, 부족한 것은 시장과 농민을 통하여 충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1년에는 일본의 서해(西海:九州)ㆍ남해(南海:四國)ㆍ산양(山陽.中國地方)ㆍ산음(山陰:中國地方) 및 기내 이동(本州 中部 및 東部)의 일부지역에 동원령을 선포하여 총병력 33만 명을 동원할 수 있는 준비 태세를 갖추었다.

당시 일본군은 조총ㆍ창ㆍ궁시ㆍ패도(雲刀)의 4가지 개인 무기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으며 개개인의 실전 경험도 풍부하여 주종간의 강한 단결을 통해 뛰어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참고> 데뽀(鐵砲)
일본말로 ‘무데뽀(無鐵砲·무철포)’는 ‘무턱대고 일을 저지르는 경우’를 일컫는다. ‘데뽀(鐵砲)’, 즉 “나는 새도 능히 맞힐 수 있다(能中飛鳥)”고 하여 이름 붙여진 ‘조총(鳥銃)’도 없이 싸움에 나서는 것은 무모하다는 의미로 쓰였다. 훗날 동아시아의 명운을 가르게 될 이 데뽀가 일본 땅에 상륙한 것은 1543년이다.

1543년 8월 25일 새벽, 정체불명의 선박 한 척이 다네가시마(種子島)의 서남단 가도쿠라곶에 표착했다.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다네가시마는 일본의 우주발사기지가 있는 곳으로 이곳에 일본 최초로 데뽀가 전래되었다.

승려 난포분시(南浦文之)가 쓴 《철포기(鐵砲記)》(1606)에 의하면, 당시 다네가시마에 표착한 선박은 남ㆍ동 중국해를 무대로 밀무역에 종사하던 안휘성(安徽省) 출신의 대두목 왕직(王直)의 소유의 배였다. 그는 1543년 8월 초에 선단을 이끌고 광둥성(廣東省)을 떠나 양쯔강 하구의 영파(寧波)로 가다가 해적선의 습격을 받고 태풍까지 만나 표류하여 다네가시마에 도착한 것이다. 이들 선박에는 100여 명의 선원들이 있었는데, 3명의 포르투갈 사람들이 함께 타고 있었으며, 이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데뽀(이하 조총)를 갖고 있었다. 섬의 도주(島主)였던 다네가시마 마사토키(種子島惠時)와 그의 아들 도키타카(時堯)는 이들이 가지고 있던 데뽀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특히 포르투갈 사람들의 사격시험에서 총신에서 섬광이 뿜어져 나오고, 굉음 소리가 들리자 모두 엉덩방아를 찧을 정도로 놀랐다.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인들이 접했던 화약병기는 가마쿠라 막부 때 몽골군(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이 침입했을 당시에 사용했던 화기와 중국에서 도입된 지화식 총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포르투갈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데뽀는 명중률이나 사정거리, 파괴력에 있어 이전의 화기를 훨씬 능가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다네가시마에서는 데뽀 제작을 위한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원래 다네가시마는 사철(砂鐵) 산지가 해안을 따라 널리 분포되어 있어 제철업이 발달했었던 섬이다. 제작은 도장(刀匠)이었던 야이타 킨베(八板金兵衛)의 책임 하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데뽀 제조는 일본도를 만들어 온 경험과 감(感), 솜씨만으로는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이질적인 분야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난관이 있었다. 난관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킨베의 딸 와카사(若狹)가 큰 역할을 하였는데, 당시 16세였던 와카사는 아버지의 기술적 난관을 해결하려고 포르투갈인에게 몸을 바쳤다고 한다. 현재, 니시노오모테市의 구모노시로(雲之城) 묘지에는 ‘와카사 충효비’가 세워져 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일본식 데뽀인 ‘종자도총(種子島銃)’은 만들어졌고, 이것은 1544년 1월4일에 시작된 야쿠시마 탈환작전에서 기대 이상의 전과를 올렸으며, 이듬해 육지에까지 전파되기에 이른다.

데뽀 전래와 함께 일본에서의 전쟁 양상도 큰 전환점을 맞는다. 당시는 쇼군의 지위가 땅에 떨어지고 약육강식이 판을 치던, 이른바 ‘센고쿠 다이묘(戰國大名)’ 시대였다. 그때 데뽀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먼저 꿰뚫어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1575년의 나가시노(長篠) 전투에서 데뽀를 유효적절하게 사용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당시 오다는 3000정의 데뽀부대를 3열로 배치한 다음 한 개 조가 사격하는 동안 나머지 두 개 조는 장전하게 하여 각 조가 교대로 사격케 함으로써 기마대를 주축으로 한 적군(武田勝賴軍)을 완벽하게 무찌를 수 있었다. 오다의 조직적 총격술은 전국시대 일본의 세력판도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고, 임진왜란 때에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데뽀가 조선에 전해지게 된 것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이루어졌다. 물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589년(선조 22) 7월, 대마도주였던 소오 요시토시(宗義智)가 우리나라에 몇 개의 조총을 진상해 왔으나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군기시(軍器寺)에 사장시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