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대응

조선의 대응

일본군이 대거 침입했다는 보고가 중앙에 전달된 것은 전쟁이 벌어진지 4일째 되는 날이었다.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으로부터 부산진성이 함락되었다는 장계에 이어, 그것이 확실하다는 보고를 또 받게 된 것이 그것이다. 급보를 접한 조선 조정은 그 대책을 논의한 끝에 임시변통으로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삼아 조령ㆍ충주 방면의 중로를 방어하도록 하고,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左防禦使)에 임명하여 죽령ㆍ충주 방면의 좌로를 방어하게 하였으며, 조경(趙儆)을 우방어사(右防禦使)로 삼아 추풍령ㆍ청주ㆍ죽산 방면의 우로를 담당하게 하는 한편, 유극량(劉克良)을 조방장(助防將)으로 삼아 죽령을 지키게 하고, 변기(邊璣)를 조방장으로 삼아 새재(조령)를 방수(防守)하게 하였으며, 전 강계부사 변응성(邊應星)을 경주부윤에 임명하였으며 각자 관군을 뽑아서 임지로 떠나도록 하였다. 각 장수들로 하여금 지역을 분담하여 적의 침입에 대처하는 계획은 세워졌으나 오랜 기간 전쟁을 겪은 적이 없는 백성들은 군인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형편이라 장수가 전쟁터로 이끌고 갈 군사가 없었다.

그렇다고 명을 받은 장수가 전선으로 떠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일이 명령을 받은 지 3일 만에 출정하고 그 뒤를 이어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으로 하여금 따르게 하였으며 좌의정 유성룡(柳成龍)을 도체찰사로 삼아 제장을 검독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경상감사 김수(金睟)는 왜란을 접하고 열읍에 공문을 보내 수령들로 하여금 각자 소속군사를 이끌고 안전한 지역에서 서울에서 장수가 이르기를 대기하도록 명했다. 문경 아래쪽의 수령들은 각기 휘하의 군졸들을 영솔하고 대구 냇가에 나가 순변사가 당도하기를 기다리다가 수일이 지나도 오지 않고 왜군이 압박해오자 놀라 동요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비가 내리는데다 군량미마저 보급이 끊어지자 싸워보지도 못하고 모두 흩어졌다. 수령들은 할 수 없이 단기(單騎)로 순변사가 있다는 문경으로 바삐 올라갔으나 그 고을은 이미 텅비어 사람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창고의 곡식을 털어서 이끌고 온 잔여군사를 먹이고 상주에 이르니 목사 김해(金敆)는 이미 적을 피하여 산속에 숨었고, 판관(判官) 권길(權吉)만이 읍을 지키고 있었다.

상주에 내려간 이일은 판관을 시켜 밤새 촌락을 탐색하여 수백 명을 모집하였으나 그들은 조련을 받아보지 못한 농민들이었다.
이일이 상주에 하룻동안 머물면서 창고를 열고 관곡을 내어 먹이도록 했다. 그는 흩어진 백성들을 모이게 하였고 숨어 있던 사람들이 찾아와 수백 명에 이르자 급히 대오(隊伍)를 편성하였다.
그는 상주 사람과 서울에서 내려온 장졸 등 800 ~ 900명을 인솔하고 상주 북쪽 냇가에서 습진(習陣)을 시켰다. 드디어 적이 밀어닥치자 산을 의지하고 돌진하였으나 고니시의 군이 급습하여 대패하고 이일은 단신으로 탈주, 문경 땅에 이르러서야 패보를 중앙에 전한 다음 물러나서 조령을 지키려 하였으나 도순변사 신립이 충주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