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진도

팔진도(八陣圖)

‘충무공(忠武公) 팔진도(八陣圖)’라 명명된 이 진형도는 진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에 이순신장군이 펼친 진형인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다만 해전의 전투대형은 아니다.

팔진도(八陣圖)라고 하면 제갈량의 팔진도를 대체로 연상하게 된다. 팔진(八陣)은 본디 태고 때부터, 금(金)ㆍ토(土)ㆍ수(水)ㆍ화(火)ㆍ목(木)ㆍ지(地)ㆍ인(人)ㆍ천(天)을 가리킨다. 또 팔진은 황제의 신하인 풍후(風后)가 만든 여덟 가지, 천(天)ㆍ지(地)ㆍ풍(風)ㆍ운(雲)ㆍ호익(虎翼)ㆍ사반(蛇蟠)ㆍ비룡(飛龍)ㆍ조상(鳥翔)ㆍ사(蛇)를 말하는데 이것을 부연하여 만든 것이 가장 유명하게 알려진 제갈량의 팔진으로서 동당진(洞當陣)ㆍ중황진(中黃陣)ㆍ용등진(龍騰陣)ㆍ조상진(鳥翔陣)ㆍ호익진(虎翼陣)ㆍ절충진(折衝陣)ㆍ연형진(連衡陣)ㆍ악기진(握機陣)을 말한다. 그리고 손자(孫子)가 말한 팔진은 방진(方陣)ㆍ원진(圓陣)ㆍ빈진(牝陣)ㆍ모진(牡陣)ㆍ충방진(衝方陣)ㆍ부저진(罘罝陣)ㆍ거륜진(車輪陣)ㆍ안행진(雁行陣)이 있고, 오기(吳起)가 말한 팔진은 거상진(車箱陣)ㆍ거헌진(車軒陣)ㆍ곡진(曲陣)ㆍ예진(銳陣)ㆍ직진(直陣)ㆍ괘진(卦陣)ㆍ충진(衝陣)ㆍ아학진(鵝鶴陣)이 있다. 이러한 진형들은 모두 육상에서나 쓰는 것이었다. 다만 해상에서도 일부의 진형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것은 각각 어떤 형태로써 이루어진 것인지 자세히 알기 어렵다.

오직 “충무공 팔진도”가 있다는 것은 그 이름부터가 “제갈량 팔진법”과는 전혀 다르다. 이것이 서로 어떤 관계가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으며, 별도의 진형으로 보아진다. 손자나 오기가 사용했던 팔진(八陣)은 오히려 우수영 전진도(戰陣圖)에 나오는 이름과 같은 것이 몇 가지 있을 뿐이다. 그 충무공 팔진도의 이름을 살펴보면, 삼첩충살진(三疊衝殺陣)ㆍ우전충살(亏箭衝殺)ㆍ등패충살(藤牌衝殺)ㆍ사적매화진(四敵梅花陣)ㆍ두저연환진(兜底連環陣)ㆍ도도연무(挑刀演舞)ㆍ언월패산진(偃月牌山陣)ㆍ기정영적(奇正迎敵) 등 8개이다.

먼저 진형의 외형에 나타나는 것부터 공통되는 점을 살펴보자. 전투복의 색깔을 보면, 과녁쪽에 있는 기마병과 사수(弓手)는 흰저고리에 파란바지, 방패수와 긴칼 요원은 아래 위 모두 회색, 창수(槍手)는 붉은 저고리에 파란바지를 입었다. 전투진을 형성한 구성원의 수는 최소 39명에서 95명까지 였다. 진1ㆍ2ㆍ3ㆍ4ㆍ6ㆍ7은 과녁 쪽의 기마병이 반달 모양의 반원을 이루고, 또 인원도 15명씩 두 패로 나누어져 있으나, 진5ㆍ8은 다르다. 진5는 8명씩 16명이 한 줄의 횡열진으로, 진8은 6명씩 두 패로 한 줄씩 종열진으로 이루되 그 중 1명씩 인솔자가 가운데 쪽으로 나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진형 안에 포함된 사람들은 활ㆍ창ㆍ칼ㆍ말이므로 이것은 훈련도감 편제에 따른 삼수병(三手兵 : 포수ㆍ사수ㆍ살수)로 운용한 것 같으나 실제 내용에 포(砲)를 운용한 것이 없다. 그 다음은 각 진형마다 내용을 조금씩 달리하고 있지만, 그 형태나 구성에 있어서 해전에서는 이용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제1선인 맨 앞줄에 기마병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과 비록 총은 없지만, 삼수(三手)인 활ㆍ창ㆍ칼로써 이루어져 있고, 곳곳에 방패로써 적을 막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다에서 배를 타고서 싸우는 데는 전혀 활용이 되지 않는 전투 절차라 할 수 있다. 다만 충무공 팔진도라는 명칭이 붙여졌기 때문에 한번 확인한 것이며, 이러한 전투는 이순신이 상륙작전(웅포해전)을 감행했을 적에 육상에서 이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지는 없을 것이다.

이 전투진의 설명문 마막 한 장에 두 마리의 말이 달려가는 마패가 두 개씩 앞뒷면의 도장이 찍혀 있는데, 거기에 옥새ㆍ절월 등을 맡아보는 기관에서 보증하는 “尙瑞院 此字號二馬牌 萬曆二十九年 七月 日(관인)”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이 끝난 지 3년째인 ‘1601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