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관계

가족관계

부모
이순신의 부친인 이정은 벼슬을 하지 않고 평민으로 지냈는데, 이로 인해 집안 형편이 점차 기울어져 갔다. 한편 이정이 하급 무관인 교위(校尉)를 지냈다는 기록도 있으나 이는 정규관리가 아닌 군대 동원시의 임시 벼슬이나 명예직이었던 것 같다. 이정은 이순신이 함경도 건원보(乾源堡)의 군관으로 있던 1583년 11월, 향년 7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하지만 이순신에게 부친의 부고는 다음 해인 1584년 1월에 전해졌고, 뒤늦게 고향으로 내려간 이순신은 3년 상을 치렀다.
이순신의 어머니는 초계(草溪) 변(卞)씨 수림(守琳)의 딸이다. 변씨(卞氏)는 1597년 4월 11일,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된 후 옥에서 나와 권율의 휘하로 백의종군하는 이순신을 찾아가는 배 위에서 8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변씨가 별세한 바로 그날, 어머니의 부고를 아직 전해 듣지 못했던 이순신은 자신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오는 노령의 어머니를 몹시 걱정했다.
이순신이 어머니의 별세를 알게 된 것은 4월 13일이었다. 이순신은 어머니를 마중하기 위해 바다로 나가서야 부음을 접했다. 당시 이순신은 백의종군의 명령을 수행하던 길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4월 19일 남행을 강행해야 했다.
형제
이순신의 형제는 항렬자인 ‘신(臣)’자를 돌림자로 하여 희신(羲臣), 요신(堯臣), 순신(舜臣), 우신(禹臣) 등 4형제가 있다.
맏형은 삼황(三皇)중의 한 사람인 복희씨(伏羲氏)를 본 따 희신(羲臣)이라 하였고, 둘째 형인 요신(堯臣)은 오제(五帝)의 요(堯)임금에서 비롯된 것이다. 순신(舜臣) 또한 오제(五帝)의 순(舜)임금을, 동생 우신(禹臣)은 하(夏)왕조의 시조인 우(禹)임금을 따서 지은 것이다.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중국 신화와 고대사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제왕들이다.
희신(羲臣)ㆍ요신(堯臣)은 일찍 죽었으며 그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알 수가 없다. 다만 이들은 순신과 함께 글을 읽었고,《사마방목(司馬傍目)》에 의하면 요신은 1573년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자녀
이순신은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方震)의 딸 방씨(方氏)와 결혼하여 회·열·면 등 3형제와 서자로 훈(薰)과 신(藎), 그리고 2명의 서녀를 두었다.
첫째인 이회(李薈, 1567∼1625)는 임진왜란 당시 아버지를 따라 한산도해전을 비롯한 많은 해전에 참전하며 공을 세웠다. 눈에 띄는 전공은 없으나 진중의 여러 일을 도맡아 하며 무장들이 불편 없이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아버지 이순신이 2품에 승진한 후 음직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가 되고 이어서 첨정에 승직되었다. 통정대부(通政大夫)좌승지에 추증되고, 임진왜란의 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책록되었다.
셋째인 면은 정유재란이 일어나던 해인 16세 때 아산 본가에서 왜적과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면은 다섯 아들 중에서도 담력과 총기가 출중하여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었으며, 이순신도 면의 장래를 크게 기대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부고를 접할 당시와 비슷하게도 이순신은 꿈을 통하여 아들의 죽음을 미리 예감했다. 아들 면을 잃은 이순신의 슬픔과 상심은 매우 컸다. 《난중일기》에는 아들의 죽음을 접하는 모습과 그에 대한 감정의 표현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이분(李芬, 1566∼1619)은 이순신의 맏형 희신(羲臣)의 셋째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에 성천으로 피난하여 그때 성천부사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서 배웠다. 그 후 정유재란을 겪으며 이순신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고금도 통제영에서 군중 문서를 맡아보며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는 외교 방면의 일을 맡았다. 음악과 산수에 밝아 그 방면에 관한 저술도 있다.
넷째인 이완(李莞, 1579∼1627) 역시 이순신의 막하에서 활약했는데 1598년 노량(露梁)해전에서 이순신이 적탄에 맞아 전사하자, 그 사실을 알리지 않고 끝까지 독전(督戰)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왜란후 1599년(선조 32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1618년(광해군 10년)에 평양중군이 되었다. 1623년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정묘호란 당시 적군이 의주를 포위하자, 끝까지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종제 신(藎)과 함께 전사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1706년 아산 현충사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