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연합군의 전투상황

노량해전의 동기세
  • 임진왜란 막바지에 조명연합군과 일본군의 당시 상황을 생각해 보고 노량 해전의 원인과 이순신 장군의 사람됨을 살펴보자.

조명연합군의 전투상황

조명연합군의 일본군 격퇴를 위한 작전을 알아보자.
조선 땅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던 일본군이나 명나라 군은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은 심정으로 나름대로 자기 나라에 이익이 되는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1598년 8월 18일 7년 전쟁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후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동로군, 서로군, 중로군, 수로군으로 군대를 조직하여 적을 섬멸하고자 하였다.
1598년 9월 17일 조명연합군의 중로군이 먼저 공격을 개시했다. 합천과 진주를 거쳐 22일에는 곤양을 점령하고 사천 구성을 탈환하였다. 그러나 10월 1일 일본군 주력부대가 지키고 있던 사천 신성을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여 합천을 지나 경상북도 성주까지 후퇴를 하고 말았다.
울산성 전투도 울산성 전투도
한편, 9월 21일 동로군은 경상북도 경주에 집결하였다. 명나라 군은 울산성을 공략하였으나 실패하여 10월 6일에 경상북도 영천까지 물러났다. 그러나 조선군은 있는 힘을 다해 싸워 동래성을 탈환하였다.
주장(主將) 제독 유정이 지휘하는 서로군은 8월에 서울을 떠나 전주에 도착하여 군사를 3갈래로 나누어 광양, 낙안, 순천으로 진격하여 9월 19일 왜교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순신 장군과 도독 진린의 연합전선인 수로군은 서로군과 합동작전을 위해 9월 15일 고금도 본영을 출발하여 여수를 거쳐 20일에는 왜교성 앞 4km 지점의 유도에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때 조명연합전선 규모를 보면 조선수군 전선이 80여 척, 명나라 수군 전선이 25척으로 총 105척 이었다.
가토 기요마사가 머물고 있었던 울산성 전투에 대하여 자료를 조사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