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통

총통(銃筒)

총통(銃筒)이라 함은 화약의 폭발력을 이용하여 각종 화살이나 탄환을 발사하는 병기를 말하는 데, 이들 총통은 조선군의 주력 화기로서 궁시와 함께 사용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 조선군이 사용하던 화기는 승자총통ㆍ차승자총통ㆍ대승자총통ㆍ중승자총통ㆍ소승자총통ㆍ별승자총통ㆍ소총통ㆍ쌍자총통 등의 소화기와 천자총통ㆍ지자총통ㆍ현자총통ㆍ황자총통ㆍ별황자총통 등의 대형 화포가 있었다.

천자총통(天字銃筒)
임진왜란 당시 사용된 화포 중에서 가장 큰 화기로, 거북선 및 판옥선에 장착되어 큰 성능을 발휘하였다. 화약 30량을 사용하여 대장군전을 발사하는 데 사거리는 900보이었다. 후기에 가서는 鳥卵彈이라고 하는 탄환 100발을 발사하기도 하였다.

현재 두 점의 천자총통이 전해 오고 있다. 하나는 명종 10년(1555)에 제작된 것으로 육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는 보물 647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하나는 현충사에 소장되어 있는 것인데 명문에는 “기유”라는 것만 나타나 있기 때문에 그 정확한 연대를 알 수는 없으나 그 외형이 『융원필비』의 내용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이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천자총통은 동차(童車)라는 포가에 장착하여 사용하였는데, 동차의 제원은 길이가 3尺 5寸, 폭이 1尺 2分, 앞쪽 높이 1尺 3寸, 뒤쪽 높이 1尺 그리고 바퀴 지름은 1尺 3寸이다.
천자총통 천자총통
지자총통(地字銃筒)
지자총통은 천자총통 다음으로 큰 화기로서, 화약 20량을 사용하여 조란탄이라는 철환 2백개나 장군전을 발사하는 데, 29근에 달하는 장군전의 경우 8백보를 날아간다.

현재 지자총통은 3점이 있는데 두 점은 각각 明宗 12년(1557) 3월ㆍ4월에 제작된 것으로 육군박물관과 동아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각각 寶物 862호ㆍ863호로 지정되어 있다. 나머지 하나는 94년 1월 여천 앞바다에서 일부가 파손된 상태로 인양된 것으로 임진왜란 당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玄字銃筒)
이 총통은 천자총통ㆍ지자총통 다음으로 큰 화포이나 그 크기는 지자총통과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한 번 발사에 4량의 화약을 사용하였고, 발사물은 차대전이나 은장차중전 혹은 조란탄의 세 종류를 사용하며, 사정거리는 800보에서 1500보에 이른다고 되어 있다.

현재 5점의 총통이 전해오는 데, 해사박물관ㆍ진주박물관ㆍ육사박물관ㆍ동아대 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 중 해군사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총통은 선조 29년(1596) 7월에 제작된 것이며, 1994년 1월 여천 앞바다에서도 임진왜란 당시의 것이 인양되었다.
현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黃字銃筒)
천자ㆍ지자ㆍ현자ㆍ황자총통은 크기가 가장 작은 화포로 화약 3량을 사용하여 조란탄 40개나 피령차중전 1발을 발사하며, 사정거리는 1100보 이다. 또 『신기비결』에 의하면 소연환 20개도 쏜다고 나와 있다.

현재 명종때의 유물 1점이 전쟁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보물 886호로 지정되어 있다.
황자총통 황자총통
별황자총통(別黃字銃筒)

황자총통을 개량하여 만든 화포로 포신의 약실 뒤에 나무 손잡이를 끼울 수 있는 모병(冒柄)을 부착시켰고 포신의 중간 무게중심 부위에 정철이 부착될 수 있도록 포이(砲耳)라는 돌기가 양쪽에 있다. 정철은 삼각다리 형태의 받침대와 결합되어 배의 갑판 등에 고정하여 상하 좌우로 쉽게 운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4량의 화약을 사용하여 조란탄 40개나 가죽날개를 달은 피령목전 1개를 발사하였으며, 사정거리는 1,000보였다. 현재 전해오는 총통은 1609년에 제작된 것으로 육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승자총통(勝字銃筒)
선조 초기에 김지(金墀)가 전라좌수사로 재임시에 육전에서 사용하기 위해 개발한 것으로 기존 우리 나라의 화기의 단점을 개량하여 장전과 휴대가 간편하게 하였고, 총신을 길게 하여 사정거리를 늘리고 명중률을 높인 것이다. 이 총통은 尼蕩介의 亂을 진압하는데 효과를 보았으며, 이후 상당수가 주조되어 북쪽의 諸鎭에 배치되었으며, 임진왜란을 비롯하여 光海君 때까지 사용되었다.

이 화기는 화약은 1량을 사용하여 철환 15개를 발사하며, 사거리는 6백보이다. 또한 가죽날개를 단 피령목전을 쓰기도 한다. 현재 모두 22점이 전해 오고 있으며, 유물의 새겨진 명문에는 중간 탄환은 8개, 작은 탄환은 10개를 발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승자총통 승자총통
차승자총통(次勝字銃筒)

이 총통은 승자총통보다 구경은 작고 총신이 긴 총통으로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에 의하면 화약 5돈을 사용하고 5개의 철환을 발사한다고 되어 있다. 현재 차승자총통은 1588년에 제작된 유물 1점이 서울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소승자총통(小勝字銃筒)

이 총통은 기존의 승자총통과는 약간은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총통이 단순히 쇠로 만든 통에 자루가 끼워져 있는 형태라 한다면 이 소승자초통은 조준이 가능하도록 총신의 앞뒤에 가늠자ㆍ가늠쇠가 부착되어 있으며, 자루가 조총의 개머리판처럼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승자총통이 사격이 용이하게끔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총통은 3돈의 화약을 사용하여 세 개의 철환을 발사한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소승자총통(1588)을 비롯하여 전쟁기념관, 경희대박물관 등에 20여 점이 전해오고 있다.

별승자총통(別勝字銃筒)

이 총통은 승자총통 계열 중에서 총신이 가장 긴 형태로, 총신이 길어 사거리가 승자총통보다 길고, 명중율도 높았던 것 같다. 이 총통은 문헌 기록상에는 전혀 보이지 않아 화약량이나 탄환수, 사거리 등은 알 수 없다. 다만 발굴된 유물에서 탄환이 발견되었는데 4개의 철환이 장전되어 있었다.

별승자총통은 현재 경북대박물관ㆍ육사박물관ㆍ경희대박물관ㆍ진주박물관ㆍ전쟁기념관 등에 많은 유물이 전해오고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이거나 진행되던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특히 1994년 초부터 전남 여천 앞바다에서 다수의 별승자총통이 인양되었는데, 발견 장소가 임진왜란 해전지와 근접된 지역이고, 유물의 명문에 「萬曆壬辰」라고 새겨져 있는 관계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판옥선 및 거북선에서 사용하다가 배가 침몰하였거나 전투 도중에 물 속으로 떨어진 것 같다. 이처럼 많이 발견되는 것은 결국 별승자총통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사용한 주된 소화기였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중승자총통(中勝字銃筒)ㆍ대승자총통(大勝字銃筒)ㆍ소총통(小銃筒)

중승자총통과 대승자총통, 소총통도 승자총통 계열의 화기로서 당시에 사용된 화기이나, 역시 기록상에는 보이지 않아 구체적인 화약 사용량이나 철환 수는 알 수 없다. 현재 중승자총통은 전쟁기념관에 한점이 있으며, 대승자총통은 고려대박물관과 전쟁기념관에, 소총통은 고려대박물관ㆍ육사박물관ㆍ경희대박물관 등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쌍자총통(雙字銃筒)

이 총통은 승자총통의 총신 두 개를 병렬로 붙여 놓은 것과 같은 형태로서 장전시간 지연에 따른 사격의 효율성을 높인 화기이며, 『神器秘訣』에는 ‘쌍안총(雙眼銃)’으로 기록되어 있다. 좌ㆍ우 두개의 총신에 각각 3개씩의 화약심지 구멍이 있으며, 탄환 2개씩을 각각 3개층으로 장전한 다음 앞에서부터 차례로 심지에 불을 붙여 사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한번 장전을 한 후 여섯번에 걸쳐 연속적으로 사격을 할 수 있는 연발총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동아대박물관ㆍ창덕궁ㆍ육사박물관ㆍ진주박물관 등지에 6점이 전해 오고 있으며, 제작 시기는 임진왜란 전후이다.

대완구(大碗口)ㆍ중완구(中碗口)ㆍ소완구(小碗口)
이 화포는 조선 전기에 사용되었던 총통완구에서 분화 발전된 화포이다. 화약의 폭발력을 이용하여 각각 포의 구경에 맞는 돌로 둥그렇게 만든 단석이나 비격진천뢰를 발사하였는데, 사격시 사용하는 화약은 대완구가 30량이고 중완구는 13량이며, 소완구의 경우는 8량이다. 사정거리는 모두 500보 내외였다.
대와구와 중완구 대와구와 중완구
호준포(虎蹲砲)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사용하였던 것으로 유명한 호준포는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에 명나라로부터 도입된 화기이다. 운용하기에 편리하도록 중량을 가볍게 하고 외부에 죽절을 두어 포신의 파열을 예방하고, 포신이 뒤로 퉁겨 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철로 만든 다리 2개를 부착하여 지상에 고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명나라가 평양성 탈환전투에서 이를 처음 사용하여 많은 효과를 보았다는 것을 알고 모방 제작하기에 이른다. 그후 야전에서 많이 사용되었으며, 또한 좁은 공간에서도 운용이 편리한 관계로 전함 등에 탑재되어 사용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호준포는 조선 후기까지 계속 제조되어 사용되었다. 현재 호준포는 국립중앙박물관과 육군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호준포 호준포
삼안총(三眼銃)

삼안총은 명나라에서 사용해 온 일종의 연발식 개념의 총으로서 3개의 총열을 하나의 손잡이에 결합시킨 다관식의 화기이다. 삼안총은 삼혈총(三穴銃)으로도 칭하며, 명나라로부터 임진왜란을 전후로 도입되었다. 그후 본격적으로 제작되어 각 진영에 배치되었고, 부족한 조총의 수요를 메꾸어 주는 주요한 화기였다. 특히 17세기에 들어서 기병용으로 까지 사용하였다.

현재 경주박물관에는 1593년에 제작된 삼안총이 있으며, 이외에도 전쟁기념관, 육군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등지에 많이 전해오고 있다.

불랑기(佛狼機)

불랑기는 원래 15세기경부터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제조되어 사용되었던 후장식 화포로, 기존의 화포와는 다르게 포탄과 화약을 자포에 장전한 다음 후미에 장착하여 사격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재장전과 사격에 소요되는 시간이 현저하게 빠른 것이 특징이다.

불랑기(佛狼機)라는 명칭은 프랑크(Frank)의 한자식 표현이다. 최초 중국 남부지역에 상륙한 포르투갈 사람들은 동남아 회교도들을 앞세우고 왔는데, 중국 관원이 저 코 크고 머리가 누런 자들을 뭣으로 부르느냐고 회교도들에게 묻자 회교도들은 자신들이 유럽 사람을 통틀어 지칭하던 프랑크라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중국에서는 유럽인을 불랑기라 통칭하고, 그후 그들이 전해 준 화포도 같은 말로 지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불랑기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게 되는 것은 임진왜란중인 1593년 1월 평양성탈환전투 이후이며, 많은 수가 제조되어 함선용 내지는 수성용으로 사용되었다. 그 이후에도 계속 제조되어 각 진영과 강화도 주변의 주요 포진지에 설치하여 구한말까지 운용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간을 비롯하여 육군박물관ㆍ전쟁기념관 등지에 십여 점이 전해오고 있다.

백자총통(百字銃筒)

백자총통은 1번의 사격시 다수의 탄환을 사격하는 화기로 1594년부터 본격적으로 제조되어 사용되었다. 대ㆍ중ㆍ소의 세 가지 종류가 있으며, 소연자(납탄) 6 ~ 7개를 발사하였다. 또 『화기도감의궤』에 의하면 15개의 납탄을 발사한다고 되어있기도 한다. 현재 유물은 2점이 있는데, 하나는 중백자총통이고, 하나는 소백자총통이다.

백자총통은 기존의 대형 화포와는 달리 운용의 편리성을 위해 중량을 줄였으며, 가늠자와 가늠쇠를 부착하여 조준사격이 가능토록 발전시켰다. 따라서 실제 야전에서 유용하게 쓰였을 것이나 일본의 대조총(大鳥銃)과 같은 화승식 화포에 비해서는 성능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