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차(火車)
화차는 각종 화기를 장착하고 좁고 험한 도로에서도 쉽게 기동할 수 있었으며, 적의 공격으로부터 군사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칼과 창 및 방패를 갖춘 기동 전투수단이다.
화차에 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태종 9년(1411) 10월이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철령전(鐵翎箭) 수십 개를 여러 개의 구리로 만든 화기(銅筒)에 넣어서 작은 수레에 싣고 화약으로 발사하면 맹렬하여 적을 제어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다.
이후 1450년에는 김효성(金孝誠)이 화차를 만들어 25명을 한 편대로 하되 앞과 양쪽을 병사가 보위하게 하고 차안에서는 7명의 총통군(銃筒軍)이 총통을 발사하며 소 두 마리로 끌도록 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당시의 화차는 수레 위에 100개의 중신기전(中神機箭)이 장전된 신기전기(神機箭機) 또는 사전총통(四箭銃筒) 50개가 장착된 총통기(銃筒機) 틀을 설치하였고 수레의 앞과 옆에는 칼과 창을 꽂을 수 있도록 하였다. 발사는 매 총통 또는 신기전의 심지에 불을 붙여서 하게 되며, 각각의 심지를 서로 연결만 해놓으면 한개의 심지에 불을 붙여 전체 화살을 연속적으로 발사할 수 있었다.

또 평시에는 물건 등을 운반하는 수레로 사용하되 전쟁이 일어나면 총통기ㆍ신기전기 틀을 장착하여 병기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적 진지를 불사르거나 적을 살상하는 무기로 쓰였을 뿐만 아니라 각종 신호의 수단으로도 사용하였다.
이후 화차에 장착하는 화기도 달라져 주자총통을 장착한 화차도 개발되었다.
이렇듯 발전한 화차는 임진왜란때에 일본군을 격퇴하는데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1593년 2월 권율(權慄)장군은 행주산성에서 변이중(邊以中)이 제작하여 가지고 온 화차 300량을 사용하여 일본군 3만여 명을 격퇴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때 변이중이 제작한 화차에는 당시에 사용되던 승자총통 50정이 장착되어 있었다.
그후 화차는 숙종때에 조총 50개를 장착하고 좌우에 방패를 다는 등 구조적 발전을 하였으며, 19세기까지 각 군영에서 계속적으로 제작되어 활용되었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유물이 없고,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을 비롯하여 행주산성 전시관, 육군박물관, 국립과학관 등에는 화차를 『국조오례의 서례』 등의 문헌 자료를 토대로 복원한 문종때의 화차가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