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선관찰

이양선 관찰

조선시대 수군들은 표류인에 대한 처리를 담당하였다. 선박과 항해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 항로에서 이탈하여 중국, 일본, 유구국(오키나와), 심지어 안남(베트남)에까지 표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표류 경험담들은 각종의 표류기로 기록되었다. 대표적인 표류기로는 성종 18년(1487) 중국에 표류한 최부의 『표해록』, 영조 33년(1757) 일본에 표류한 이지항의 『표해록』, 영조 46년(1770) 유구국에 표류한 장한철의 『표해록』, 영조 21년(1797) 중국에 표류한 이방익의 『표해가』, 순조 5년(1805) 여송(필리핀)에 표류한 문순득의 『표해록』, 순조 18년(1818)에 중국쪽에 표류한 최두찬의 『승사록』등이 있다.

표류인의 귀환
표류인들이 본국으로 귀환할 때는 일정한 루트가 있었다. 즉 조선·중국·일본 간에는 상호국의 표류민 송환 체제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해적으로 오인되어 죽임을 당하는 경우라든가 사정이 여의치 않아 송환되지 못하는 경우 등이 있었다.
중국에 표류한 경우는 기본적으로 육로를 통한 송환 체제가 성립되어 사신편에 표류민이 송환되었다. 안남국에 표류한 경우는 중국을 통하여 송환되었다. 유구국의 경우에는 일본과 중국 두 곳이 모두 이용되었다. 선박은 주로 상선을 이용하였다. 특히 조선과 일본 간에는 15세기 중엽 이후에 대마도주가 송환 업무를 대행하였는데, 대마도주가 표착지 영주로부터 표류민의 신병을 인도받아 송환하는 방식이었다. 표류민들이 타고 갔던 선박이 양호할 경우에는 문정을 받고 난 후 해당 국가의 지시에 따라 선박과 함께 해로로 송환하기도 하였다.
조선에 표착한 중국인의 경우는 대부분 육로로 우리나라 사신 편에 많이 송환되었으나, 선박이 많이 파손되지 않았을 경우는 선박을 수리 받아 바로 해로를 이용해 중국 강남 지역으로 송환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경우는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인을 부산에서 대마도를 경유하여 송환되었다. 유구인들은 자신들의 소원에 따라 중국이나 일본을 경유하여 송환되었다.
이방인의 표착
한반도로 향한 관문으로 남단에 위치한 제주도에는 중국·일본·유구(오키나와)의 주민뿐 아니라 서양인도 표류하였다. 제주에 표착한 외국인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중국인들은 대부분 절강성 영파부에 소속된 선박에 탑승했던 사람들이다. 중국 배는 앞뒤가 평탄하고, 앞은 낮고 뒤는 약간 높은 경우가 많으며 돛 세 개를 세우고 있었다. 다음으로는 일본인들인데 일본 배의 모양은 이물(배 머리)이 뾰족하고 고물(배 뒤쪽)은 넓으며 돛대 하나를 세워 놓은 형태였다.
유구와 제주는 태풍과 쿠로시오 해류가 지나는 경로에 있어 두 지역은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장사나 고기잡이, 농사일을 위해 섬들을 왕래해야 했던 유구인들은 태풍으로 제주에 표류하였다. 광해군 3년(1611)에 유구국 왕자가 타고 있던 상선이 제주에 표착한 일이 있었는데 제주 목사 이기빈과 제주 판관 문희현 등이 처음에는 이들을 예우하면서 여러 날 접대하다가 재물에 욕심이 생겨 모두 죽이고는 그 물화를 몰수하고 말았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이기빈 목사는 북청으로, 문희현은 북도로 유배되었다. 이 표류선박에 대해서 『조선왕조실록』 등에는 유구국 왕자라 기록되어 있지만, 중국 상선이라는 설과 탑승한 왕자는 안남 왕자였다는 설도 있다.
이 밖에 서양인의 표류도 있어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인조5년, 1627)와 하멜 일행(효종4년, 1653) 등이 제주도에 표착하기도 하였다. 그중 벨테브레는 조선인 박연으로 귀화하여 훈련도감에서 무기 개량에 종사하다가 여생을 조선에서 마쳤다. 하멜을 포함한 일행 일부는 일본으로 탈출하였고, 이후 나머지 일행들도 일본으로 인계되어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멜 일행의 전라좌수영 생활
하멜 일행이 난파하여 제주 해안에 표착한 1653년 8월 16일부터 1666년 9월 14일 일본으로 탈출할 때까지 조선에서 보낸 기간은 약 13년 28일이다. 이 기간 동안 하멜 일행은 제주, 서울, 강진, 남원, 순천, 여수를 전전하면서 갖은 고초를 겪었다.
1663년 3월초, 하멜 일행은 남원, 순천, 그리고 전라좌수영인 여수에 각각 분산되었다. 이후 『하멜보고서』의 내용은 여수에서의 생활이 주를 이루게 되는데, 이들은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서로 방문할 수가 있었다. 하멜 일행은 좌수영 내에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탈출시 성벽을 넘어갔다는 것에서 추정할 수 있다.
하멜 일행의 삶은 지휘관의 교체에 따라 희비가 엇갈렸다. 가혹한 수사가 통치할 때는 뜨거운 태양과 겨울비 아래서 대기 자세로 서 있기도 했다. 그러나 이도빈과 같은 수사는 백성의 신임을 얻었으며 하멜 일행에게도 호의를 베풀었다. 1665년에는 작은 배를 얻어 식량을 구하기도 하고, 탈출할 가능성을 찾아 섬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수도 있었다. 1666년 신임 수사는 하멜 일행에게 하루 170m의 새끼를 꼬게 하는 등 잡일을 명령하였다. 이러한 끝이 없는 부역과 노예 같은 생활의 두려움이 탈출의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마침내 1666년 두 배의 값을 주고 배를 구하여 능숙한 항해사인 순천의 얀 피터슨과 함께 9월 4일 탈출에 성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