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차 출전

주요현황

이순신 8차출전 전현황
전투명 일시 장소 전과
명량해전 1597. 9. 16 전남 해남군,
진도군 사이 울돌목
적선 133척 중 31척 격파, 구루시마 사살

전투개요

1596년 12월, 4년간의 소강상태와 더불어 명과 일본의 강화가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풍신수길)는 조선에 재침할 것을 결심한다.
이어 1597년 1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소서행장)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가등청정)는 임진년의 경험을 되살려 선봉군 14,000명을 거느리고 조선에 상륙한다.
육군 11만 5,000명과 수군 7,700명 등 12만 1,100명의 8개 군단과 조선에 남아있던 2만 400명을 합하여 모두 14만 1,500명이 재침에 투입되었다.
상황도(명량해전)

그러나 이순신은 그해 2월 요시라의 반간계(反間計)와 조정 대신들의 탄핵들 받아 조정으로 압송되어 투옥되었고, 모진 고문을 겪는 고초 끝에 백의종군(白衣從軍)을 명받았다.
이순신을 대신하여 삼도수군통제사에는 원균이 임명됐다. 하지만 그의 업무수행은 이순신에 미치지 못했고, 병사와 전함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 또한 무모한 전략과 전술을 펼쳐 스스로 패전을 자초하였다. 또한 수영의 방어조차 하지 못하여 결국, 7월 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수군은 전멸하고 말았다. 이날의 피해로 256척의 전선이 침몰되었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조방장 배흥립 등이 전사했고, 원균 역시 육지로 도망하다 매복한 왜군에게 목숨을 잃었다. 경상우수사 배설(裵楔)만이 자신의 전함 12척만을 이끌고 탈출했을 뿐이었다. 이순신이 피나는 노력으로 쌓아 올린 전장의 기반이 한순간에 무너진 것이었다. 조선 수군의 대패로 왜군은 기세를 몰아 남원성과 전주성 등을 차례로 점령했다. 8월 3일 이순신은 조정으로부터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는 유서를 받았다. 교서를 받은 즉시 이순신은 임지를 향했다. 낙안까지 오는 길에 군사 60여 명을 모았다.
15일에 보성에 도착하여 임금으로부터 ‘수군을 폐하고 육군에 참가하라’는 유서를 받았다. 비록 수군이 미약하지만 전선이 있고 군사도 상당히 끌어 모아 120명이나 되었다. 그는 장계를 써서 수군의 중요함을 적극 주장하였다.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김억추(金億秋)와 협력하여 모두 12척의 전선을 수습했다.
8월 28일 새벽 8시경에 왜선 8척이 불의에 어란포 앞 바다에 나타났던 것이다. 이들은 왜선의 선발대였다.
이순신은 이때 엄숙한 명령을 내리고 깃발을 휘두르며 ‘적선추격’이라는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몸소 최선두에 위치하여 북소리를 울리면서 추격을 개시했다. 이와 같은 이순신의 명령과 모습을 군사들은 이순신의 뒤를 따르며 추격전에 가담하였다. 이렇듯 맹렬한 기세로 다가오는 조선 수군의 함대를 보자 왜적들은 불리함을 느끼고 곧 퇴각하기 시작했다.

명량해협전경 명량해협전경
이순신은 추격을 중지하고 12척의 함대를 장도(노루섬)로 옮겨 밤을 지냈다. 이튿날 8월 29일에는 벽파진(碧波津)으로 이동하였다.
이 벽파진은 진도의 동쪽 끝머리에 위치하여 해남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며, 서북쪽에는 남해상에서 서해상으로 빠져나가는 유일한 길목인 명량(鳴梁 : 울돌목)이라는 해협이 있다. 이 해협을 지나자마자, 바로 오른편 해남 쪽으로 전라우수영이 있다. 이순신은 서해로 나가는 길목인 명량 해협을 최종적인 방어선으로 설정했다.

9월 7일 12척의 적선이 벽파진을 향하여 들어오고 있었다. 이순신은 선두에 위치하여 적선을 공격하였다. 왜선들은 이순신의 강력한 반격으로 또다시 퇴각했다.

9월 14일 적선 200여 척 중에서 55척이 어란포로 들어왔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순신은 전령선을 우수영으로 파견하여 피난민들에게 급히 안전한 지역으로 이동할 것을 권고하고, 이어 15일에는 13척의 전선으로 명량해협을 등 뒤에 두고, 싸움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전선을 거느리고 우수영으로 진을 옮겼다. 그리고 결전에 앞서 우수영의 모든 장령들을 소집하여 결사항전을 맹세하였다.

9월 16일 이른 아침에는 망군으로부터 수많은 왜선이 들어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순신은 적의 이동을 보고받은 즉시 모든 전선에 대하여 출전 명령을 내리고, 스스로 최선두에서 왜선을 격멸하기 위하여 명량해협을 향하였다. 이때는 목포쪽으로 북서류가 세게 흐르고 있었다. 거의 때를 같이 하여 순조를 타고 왜적선 333척 가운데서 명량해협 입구까지 돌입한 왜선은 모두 133척이었다.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김억추로 하여금 수로를 가로막을 수 있게 우수영쪽 해안과 진도 해안 양쪽에 비스듬히 조류의 저항을 작게 받도록 수중철색을 설치하여 걸리게 했다.
명랑해전도 - 해군사관학교 명랑해전도 - 해군사관학교

이것으로 인해 왜적선은 이순신 함대를 공격하는 데 큰 장애가 되었다. 그 철색에 걸린 왜적선에 그들의 배들이 서로 부딪쳐 깨어지곤 했다. 그러나 워낙 왜적선이 많아 수중철색을 넘어 왔다. 조선수군의 전선을 몇 겹으로 포위하면서 포를 쏘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겁에 질려 나서기를 망설이는 거제현령 안위를 꾸짖었다.

“안위야,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감히 물러난다고 해서 살 듯싶으냐?”
이순신의 말에 안위는 앞에 나가 용전을 펼쳤다. 이순신은 역시 망설이고 있는 중군장 김응함을 호되게 질책하고 앞으로 나가 싸우게 했다.
적선들은 안위의 전선으로 모여들어 공격하고 있었으나, 안위와 그들의 군사들은 죽을힘을 다하여 적과 싸우고 있었다. 이순신은 급히 안위의 전선으로 뱃머리를 돌려 총통을 쏘아 왜선 3척을 격침시키고 안위의 전선을 구했다.
또한 이순신을 따른 녹도만호 송여종(宋汝倧)과 평산포 대장(代將) 정응두(丁應斗)의 전선이 힘을 합하여 왜군의 대장선을 격파하였다. 그리고 파도에 떠다니던 적장 마다시(馬多詩)의 목을 베어 돛에 매달았다.
이를 본 왜군들은 사기가 꺾여 전세가 불리함을 깨달았고, 남은 전선을 이끌고 퇴각했다. 이리하여 13척의 전선으로 333척의 왜선을 물리쳤다. 이것을 가리켜 세계 해전사상의 기적이라는 ‘명량대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