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지역

  • 백의종군
  • 백의종군로
날짜별 백의종군로 장소
1597년 6월 2일 6월 3일 6월 4일~7월 18일
합천 삼가 현청 합천 삼가 현청 합천 도원수 진
합천 지역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 기간 중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이다. 합천은 권율 장군의 도원수 진이 있었던 곳으로, 충무공이 6월 2일 저녁 무렵 삼가현청에 도착해 7월 18일 도원수 진에서 원균의 패전소식을 듣고 권율의 명으로 전황을 살피러 길을 떠나 삼가를 거쳐 산청으로 갈 때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충무공이 합천에 있으면서 머물렀던 곳은 도원수 진이 있었던 모여곡 이어해 집이라는 곳인데 현재 율곡면 낙민리 매실마을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주요지점으로는 1)삼가현청 2)개벼리 3)도원수 진 4) 모여곡 이어해 가 등이 있다.
백의종군로

삼가현청 - 6월 2일 유숙

무공이 6월 2일 유숙한 삼가 현청은 지금 없어지고 현재는 삼가면 사무소가 있다. 삼가면 사무소 마당에 백의종군 기념 표지석이 있다.

당시 삼가 현청이었다는 증거로 부속건물로서 연회장소로 사용되었던 기양루가 근처에 있다.

참고로 기양루는 경남유형문화재 제93호인데 조선시대 삼가현성(三嘉縣城) 안에 있던 관청의 부속 건물로 보인다. 조성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건물에 이순신 장군이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의 지방관공서 건물이 15세기에 많이 지어졌으므로, 그 무렵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정면에서 바라보는 삼가현청 삼가현청

기양루라는 이름은 이 지역의 명칭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의 지명이 통일신라의 경덕왕(景德王, 742~765 재위) 때 삼기현(三岐縣)에서 강양군(江陽郡)으로 바뀐 적이 있었는데, 이 지명에서 ‘기’(岐)와 ‘양’(陽) 두 글자를 따왔을 것이라 여겨진다.

개벼리

충무공이 도원수 진을 바라본 곳은 현재 개벼리 입구이다. 합천 ‘개벼리’는 험준하기가 이를 데 없었는데, 표지석이 있어 옛날 충무공이 원수진을 바라보았던 곳임을 알 수 있었다.
개벼리는 한문으로 견천(犬遷)이라고 표기한다.
고합천군지(古陜川郡誌) 산천조(山川條)에도 견천이라고 지칭하며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견천은 고을 동쪽 십리 되는 천곡면에 있는데 푸른 낭떠러지 좁은 길로서 위로는 절벽을 짊어지고 아래는 깊은 못이 고여 둘러 돌아 굴곡이 2~3리나 된다. 속설에 의하면 합천 개와 초계 개가 서로 따라 다녀서 길이 되었다고 한다. (犬遷-在郡東十里 泉谷面 綠崖棧道 上負絶壁 下臨深潭 索回屈曲 二三里 俗傳 郡之犬 與草溪犬 相隨而行 因此成路云)
정면에서 바라보는 삼가현청 삼가현청

향토사학자인 합천신문사 사장 박환태씨의 주장에 의하면, 이순신 장군이 정양목 쌍다리 부근에서 합천 고을로 들어오지 않고 초계 길로 접어들어 10리쯤 가서 권율 도원수진이 바라보인다고 했는데, 충무공이 도원수 진을 바라본 곳이 바로 문림 동구밖 개벼리 입구라고 했다.

도원수 진

6월 4일 합천 땅에 도착한 충무공은 나흘 만에 도원수를 만났다. 백의종군 명으로 도원수 진이 있는 곳에 와서 바로 도원수를 만나지 않고 나흘 만에 만났다는 것은 당시 도원수가 진 중에 머물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추측을 해 볼 수 있다.

당시 권율 도원수가 나온 진은 어디에 있었을까. 현재 율곡면 낙민로터리 부근에 있는 낙민정(樂民亭) 부근으로 유추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승람)에 낙민정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군 서쪽 15리에 있다. ○ 이첨(李詹)의 기문에, “구름 낀 봉우리가 동쪽으로 뻗었고, 여러 산골 물이 합쳐져서 큰 냇물로 되어 합천ㆍ초계를 지나 강에 들어간다. 두 고을 경계에 들판이 넓고 산이 열려서 기상이 맑고 멀며 사랑스럽다. 그러나 빈객이 왕래할 때에 이 경계에서 영접할 곳이 없음을 한스럽게 여긴 지가 오래였다. 홍무(洪武) 계유년에 계림(鷄林) 이인실(李仁實)이 초계의 지군(知郡)으로 와서 정사가 공평하고 송사가 잘 처리되었으며, 다음해에 풍년이 들었다. 이에 여러 사람에게 의논하여 놀고 있는 자들을 부려서 기한을 정하고 집을 짓고 방을 만들어서 기숙하기에 편리하고, 헌함을 만들어서 관람하는 데에 상쾌하게 하였다.
정면에서 바라보는 합천 충무공 백의종군 행보 기념비 합천 충무공 백의종군 행보 기념비

북쪽으로 가야산이 바라보이고 남쪽으로 무월(舞月)이 보인다.(중략)정자 서쪽 두어 마장 되는 지점에는 길이 절벽에 났는데 쳐다봐도 굽어봐도 천 길이다. 길이 아주 좁아서 길가는 사람이 서로 피하여 가기를 수백 보 지난 다음이라야 험한 곳을 벗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동쪽으로 서쪽으로 가는 자가 반드시 이 정자에 휴식하게 되니 그 즐거움이 어떠하겠는가.

“정자 서쪽 두어 마장 되는 지점에는 길이 절벽에 났는데 쳐다봐도 굽어봐도 천 길이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난중일기 6월 4일 “합천 땅에 이르러 말을 쉬고, 5리쯤 가니 길이 쌍 갈래이다. 한 길은 곧바로 합천군으로 들어가는 길이요, 또 한 길은 초계로 가는 길이다. 그래서 강을 건너지 않고 가다가 거의 십리쯤 가니, 원수(권율)의 진이 바라보였다.”기록과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모여곡 이어해 가 - 6월 6일~7월 17일 유숙한 곳

당시 충무공은 삼가현청을 출발하여 합천 초계의 권율 도원수 진에 도착하여 권율관아 근처인 문보의 집에 짐을 풀고 하루를 유숙하였다.
문보의 집은 지금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모여곡에 도착한 이순신은 이틀 밤을 문보의 집에서 자고 3일째인 6월 6일 저녁 이어해의 모친(당시 과부)을 다른 집으로 옮기게 하고 이어해의 집을 도배하고 군관 휴식소도 두 칸 만들어 살 곳을 정했다.
충무공은 문보의 집에서 어어해 집으로 옮겨 40여 일간을 머물렀다. 6월 6일부터 7월 17일간 유숙한 이어해 집은 율곡면 낙민리 매실마을에 가옥이 개량되어 있지만 노후하고 불량한 경관을 유지하고 있다.
멀리서 바라보는 이어해 가 이어해 가

충무공이 이어해의 집에 도착하자 늦게 모여곡 주인집의 이웃에 사는 윤감, 문익신이 보려 왔다고 한다.

권율 종사관 황여일은 누구인가?

6월 7일 권율의 군관 박응사와 유흥이 직접 와서 인사를 드렸으며 원수의 종사관 황여일은 사람을 보내 문안을 했다. 당시 권율의 종사관인 황여일은 문신으로서 도원수부의 일을 보았다. 충무공의 난중일기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므로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황여일(1556∼?)의 본관은 평해(平海)로 호는 해월헌(海月軒)·매월헌(梅月軒)이다.
1576년(선조 9)에 진사가 되고 1585년 개종계별시문과(改宗系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94년 형조정랑이 되고 곧 도원수 권율(權慄)의 종사관으로 내려갔는데, 얼마 뒤 도원수의 허락을 받고 일시 귀가하여 도원수와 함께 추고(推考)당하였다. 1598년 사서에 이어 장령이 되고, 이듬해 장악원정을 역임하였다.

1601년 예천군수가 되고 1606년 전적을 역임, 1611년(광해군 3) 길주목사, 1617년 동래진병마첨절제사가 되었다. 평해의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조천록 朝天錄’‘해월집’14권 7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