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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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역 백의종군로 시간 및 장소
시간 1597년 7월 27일~8월 3일
장소 진주 수곡 손경례의 집

진주지역은 충무공이 7월 27일 정개산성 건너편 손경례의 집으로 옮겨 머물다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 임명 교지를 이곳에서 받았다.

충무공 백의종군 행로의 마지막 지점이라는 것과 삼도수군통제사 재수임지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이다.
백의종군로

손경례의 집 - 7월 27일~8월3일까지 머문 곳

7월 27일 이른 아침에 정성(鼎城) 건너편 손경례의 집으로 옮겨 유숙하였다.
현재 손경례의 집은 진주시 수곡면 원계리에 있으며 사랑채 안채건물 2동이 있다. 가옥은 개량 한옥으로 처마 아래에 빛바랜 이순신장군의 영정이 있고 사랑채 전면에 1965년에 건립된 삼도수국통제사 재수임기념비가 서있다.

손경례는 밀양손씨의 후예로서 시조는 손순(孫順)인데 일연스님이 지은『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이 전해져 온다. 옛날에 손순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살림이 가난하여도 부모봉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다. 하루는 식사 중에 어린자식이 늘 부모님의 밥상에 앉아 노부모의 음식을 먹어서 손순 부부가 의논 끝에 자식은 다음에 또 낳으면 되지만 부모님은 한번 가시면 다시 모시기 어려우니 어린자식을 몰래 내다버리기로 결심하고 어린자식을 땅에 묻기 위해 땅을 파다가 돌로 만든 석종을 수습하게 되었는데 석종의 소리가 너무도 아름답거니와 이상히 여겨 자식을 묻지 않고 석종을 집으로 가져왔다. 집에서 석종을 치는데 아름다운 종소리가 임금이 계시는 궁궐에 까지 들려 임금이 연유를 알아오게 한즉 내용을 듣고는 효성이 지극하다하여 보살핌을 입었다고 적고 있다.

효자 손순을 시조로 하는 밀양 손씨의 후예인 손수령(1417~1486)이 조선 세종조의 무신이었던 하경복의 동생 하경리의 딸과 혼인하면서 수곡면 사곡에 살게 되었고 손수령의 호가 오곡이므로 오곡공파라 하여 파조로 삼고 있다. 손수령은 8형제를 두었는데 막내인 손 시(時)(1441~1474)가 이곳 원계로 이거하여 현재까지 살고 있다.

손 시의 손자 손난원(1514~1583)의 셋째 아들이 손경례(孫景禮)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7품인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이르렀다. 지금도 후예가 이곳에 살고 있고 현재 있는 이집도 후손이 소유하고 있다. 따라서 약 550년간 이곳에서 대를 이어 살고 있는 것이다.
현재 건물에 걸린「우계서실」편액은 손창수(孫淐壽)의 호가 우계(又溪)여서 우계서실이라 하였는데 손창수는 한말의 대유학자로 이름난 회봉 하겸진(1870~1946)의 문인으로 활동하였다.

1597년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53세였으며 손경례의 생몰년대는 1710년 경인년의 족보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비슷한 연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모함으로 벼슬을 박탈당하고 백의종군을 하면서 이곳 원계의 손경례 고택에 머문 것은 1597년 7월 27일부터 8월3일까지 였다.
정면에서 바라보는 손경례 가 손경례 가

7월 27일부터 손경례의 집에서 유숙 기간중 군사를 훈련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충무공의 난중일기에 따르면 7월 29일에 “냇가로 나가 군사를 점고하고 말을 달렸는데 원수가 보낸 군대는 모두 말도 없고 활에 화살도 없으니 소용없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원계 마을 앞의 진배미들을 1974년에『이충무공진배미 유지』라는 이름으로 경상남도 기념물 제16호로 지정하였고 1975년에는『이충무공군사훈련유적비』를 세웠다.


8월3일에는 “이른 아침에 선전관(선전관) 양호(양호)가 뜻밖에 들어와서 교서(교서)와 유서(유서)를 가져 왔는데 분부의 내용인즉 겸 삼도수군통제사(겸삼도수군통제사)의 명령이었다.”고 기록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지금으로부터 410여년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선조 임금으로부터 통제사의 교서와 유서를 받았던 역사의 현장이다. 선조가 충무공에게 내린 삼도수군통제사 재수임 교서가 충무공 전서에 전한다.

왕은 이르노라. 오호라! 국가가 의지할 곳은 오직 수군뿐인데, 하늘이 화를 내려 흉악한 칼날이 다시 성하여 마침내 삼도의 군사를 한 번 싸움에서 모두 잃었으니 이후로 바다 가까운 고을은 누가 다시 막아 낼 것인가? 한산도 이미 잃었으니 적이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눈썹을 태울 존망의 위급함이 조석에 닿아 있으니, 지금의 계책은 오직 흩어져 없어진 군사를 다시 모으고 전선을 거두어 합쳐, 급히 아군에 요긴한 지점에 의거해 엄숙히 한 군영을 만들면, 도망해 숨어 돌아오지 않던 무리들이 돌아갈 바를 알 것이요. 바야흐로 큰 적들 또한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하건대, 그대는 일찍 수사 책임을 맡았던 그날부터 이름이 드러났고 또 임진년 승첩이 있은 뒤로 업적이 크게 떨쳐, 변방 군사들이 만리장성처럼 든든히 믿었건만, 지난번에 그대의 직함을 갈고 그대로 하여금 백의종군토록 한 것은 역시 사람의 생각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었거니, 오늘 이 같은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이제 각별히 어두움에서 경을 일으키고, 상복을 입은 채로 다시 천거하여 겸 충청. 전라. 경상 등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노니, 경은 지금 나아가 군사를 모아 어루만지고 흩어져 도망간 자들을 찾아 불러 단결시켜 수군의 진영을 회복하고 요해지를 지켜 군성을 일시에 떨치면 이미 흩어진 백성의 마음을 다시 편안케 할 수 있고, 적 또한 우리가 준비가 있음을 듣고 감히 다시 방자하게 창궐하지 못할 것이니, 경은 이를 힘쓸 지어다.
수사 이하는 모두 지휘하며, 규율을 범하는 자는 일체 군법대로 시행하려니와, 나라 위해 몸을 잊고 경우에 따라 나가고 후퇴하고 하는 것은 이미 그대의 능력을 하는 바라, 내 구태여 무슨 말을 많이 하리오.
저 오나라의 장수 육항이 국경 강 고을을 두 번 맡아 군사상의 할 일을 다했던 것이며, 또 왕손이 죄인의 이름으로 일어나 능히 적을 소탕하는 공을 세운 것 같이, 그대는 충의의 마음을 굳건히 하여, 나라 건져주기를 바라는 우리의 소원을 이뤄주길 바라며, 이제 교지를 내리니 그대는 알지어다.

王若曰。嗚呼。國家之所倚以爲保障者。惟在於舟師。而天未悔禍。兇鋒再熾。遂使三道大軍。盡於一戰之下。此後近海城邑。誰復屛蔽。而閑山已失。賊何所憚。燒眉之急。迫於朝夕。目下之策。惟當召聚散亡。收合船艦。急據要害去處。儼然作一大營。則流逋之衆。知有所歸。方張之賊。亦庶幾乎式遏。而膺是責者。非有威惠智幹素見服於內外。則曷能勝斯任哉。惟卿聲名早著於超授閫寄之日。功業再振於壬辰大捷之後。邊上軍情。恃爲長城之固。而頃者遆卿之職。俾從戴罪之律者。亦出於人謀不臧。而致今日敗衂之辱也。尙何言哉。尙何言哉。今特起卿于墨衰。拔卿于白衣。授以兼忠淸。全羅。慶尙等三道水軍統制使。卿於至之日。先行招撫。搜訪流散。團作海營。進扼形勢。使軍聲一振。則已散之民心。可以復安。而賊亦聞我有備。不敢再肆猖獗。卿其勖之哉。水使以下並節制之。其有臨機失律者。一以軍法斷之。若卿殉國忘身。相機進退。在於已試之能。予曷敢多誥。於戲。陸抗再鎭河上。克盡制置之道。王遜出自罪籍。能成掃蕩之功。益堅忠義之心。庶副求濟之望。故玆敎示。想宜知悉。(忠武公 全書 卷首 起復授三道統制使敎書)

이곳은 1597년 4월 1일부터 1597년 8월 3일까지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일관해온 충무공의 백의종군의 마지막 지점임과 동시에 칠전량 전투에서 왜군에게 대패하여 조선의 수군이 전멸했음에도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라고 상소를 올리고 율돌목의 물살과 지형을 이용해 300여척이 넘는 왜군의 수군을 물리친 명랑대첩을 있게 하고 본국으로 퇴각하는 왜군을 끝까지 막고 싸워 승리를 이끌면서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라고 했던 노량해전을 있게 한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이곳에서 삼도수군통제사의 재임교서를 받은 것은 충무공 이순신이 구국의 성웅으로 이름을 남기게 된 일생의 전환점이고 조선이 7년간의 전란을 승리로 이끌게 되는 역사의 전환점을 만드는 계기가 되는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8월 3일 아침 선전관 양호가 교서(敎書)와 유서(諭書,깨우치는 글)을 가져오왔는데 겸삼도통제사(兼三道統制使)의 명령이었다. 숙배한 뒤에 받자온 서장을 써서 봉해 올리고 곧 길을 떠나, 오후 8시께 횡보역(하동군 횡천면 여의리)에서 쉰 다음 자정이 넘어 두치리에 도착하니 먼동이 트려했다.

쌍계동(하동군 화개면 탑리)에 이른 즉 뾰족뾰족한 돌들이 흩어져 있는데 잦은 비에 물이 넘쳐 어렵사리 건넜다고 전한다. 석주(구례군 토지면)에 이르자 이원춘과 유해가 복병하여 지키다가 나와서 보고 적 토벌할 일에 대해 많이 이야기 하였다. 해가 저물어서 구례에 이르렀는데 경내가 쓸쓸하였다 한다.
정면에서 바라보는 여의마을 입구 여의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