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게는 아직 전선이 12척이나 있습니다.

노량해전 이전의 상황
  • 연전연승을 이끌었던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백의종군하기까지의 과정과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괴멸될 위기에 처한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까지 장군의 나라사랑하는 정신을 깊이 되새겨 보자.

신에게는 아직 전선이 12척이나 있습니다.

13척 대 133척의 싸움에서 승리의 원동력을 알아보자.
1597년 8월 3일 칠천량 해전의 패전으로 선조 임금은 대신들을 모아 놓고 대책을 의논하였다. 그리고 이항복의 말을 받아들여 이순신 장군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날 군관 10여명과 함께 진주, 구례, 곡성, 옥과, 순천, 낙안, 보성을 거쳐 8월 18일 회령포에 도착했다. 오는 동안 여기저기 흩어졌다 모여든 부하가 120명이나 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회령포에서 경상우수사 배설로부터 10여 척의 전선을 인수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가진 전선은 단지 12척이었다.

당시 수군의 어려움을 안 선조 임금은 수군을 없애고 육군을 도와 육지에서 싸우라는 지시를 내렸다.
조선군과 일본군의 이동로 조선군과 일본군의 이동로
명량해전 배치도 명량해전 배치도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아직도 전선이 12척이나 있으니 있는 힘을 다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라고 선조 임금께 글을 올려 해전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8월 20일 진영을 회령포에서 이진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24일에는 다시 어란포로 이동하여 명량해전을 대비하여 장도(노루섬)에 주둔했다. 이때까지 이순신 장군이 확보한 조선 수군의 규모는 전선 13척과 조탐선[照探船빠른 속도를 이용하여 미리 앞의 현황을 조사하는 배] 32척이 전부였다.
1597년 9월 14일 일본전선 200여 척 중 55척이 어란포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들은 이순신 장군은 9월 15일 진영을 벽파진에서 전라우수영으로 옮겼다.
이순신 장군은 장수들을 소집하여 진도와 화원반도 사이를 가르는 명량해협을 막아 싸울 것이라는 전술을 설명했다. 그리고 명령을 위반할 때에는 조금도 용서치 않겠다고 강조하였다.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필사즉생 필생즉사 必死則生必生則死)

라는 말로 승전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하였다.
9월 16일 이른 아침에 일본전선 133척과 이순신 장군 전선 13척이 명량(울돌목)의 좁은 수로에서 접전을 펼쳤다. 이 전쟁에는 해적출신 일본장수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선봉으로 나왔다.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당항포 해전에서 전사한 형을 생각하며 이순신 장군에게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다. 그러나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이순신 장군이 거느린 전선의 집중포격을 받고 바다에 빠졌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목을 돛대에 매달아 일본군의 사기를 꺾어 대승을 거두었다.
명량해협을 흐르는 바닷물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날이 저물 무렵 일본군은 조류를 타고 후퇴함으로써 명량해전은 조선 수군의 완전한 승리로 끝이 났다.
1597년 7월 치욕적인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시작된 정유재란은 2개월만에 명량해전의 승리로 극적인 반전을 가져왔고 국난위기 극복의 전환점이 되었다.
명량해전도 명량해전도
명량해전에서 죽은 일본장수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형은 임진왜란 중 어느 해전에서 죽었는지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