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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특집]가야유산 기획⓲ 가야의 왕도 금관을 썼을까?

작성2020년 04월[Vol.85] 조회190

 


고대의 금공품은 당시 공예기술의 척도이자 신분을 가장 잘 드러내는 유물이다. 가야의 대표적인 금공품은 귀걸이(3월호)와 머리에 쓰는 보관(寶冠)이다. 가야 유적에서 나온 관은 4점이며, 출토지가 애매한 것까지 합쳐도 6점에 불과하다. 하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와 분명히 구분되는 최고급 유물이다.

 

초기 가야 사람들도 관을 썼다?!

중국의 삼국지위서 동이전 한조에는 1~3세기 가야의 풍속을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어 풍속은 의책(衣幘)(입고 착용하기를) 좋아한다는 부분이다. 가야 사람들은 의복뿐만 아니라 머리에 고깔이나 두건을 즐겨 썼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북쪽 도로(현재의 구지로) 밑에서 발굴한 널무덤(2세기)에서 주인공의 뼈 흔적이 고스란히 출토됐다. 이마 부분에서 띠() 모양의 철기도 나왔다. 발굴조사자들은 이 철기를 기록 속 ()’의 하나인 철관(鐵冠)으로 본다.

 

최초의 가야 왕관

삼국지는 변한 12국에 건장한 체격의 왕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들이 백성들의 고깔이나 철관과 다른 특별한 왕관(王冠)을 썼을 것이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과연 그 모습은 어떠했을까?

사실 이를 증명하는 유물은 20여 년 전 김해 대성동 29호분에서 나왔다. 가야고고학에서 금관가야 최초의 왕묘(王墓)’라 일컫는 무덤이다. 그런데 도굴 구덩이에서 30여 점의 금동 조각만 수습되면서 전문 고고학자들조차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운 좋게도 이 유물을 직접 복원하고 보고서까지 작성하는 호사(?)를 누렸다. 몇 날 며칠 한 점, 한 점 붙여가는 지난한 작업 끝에 머리에 쓰는 금동관(金銅冠)의 일부임을 밝혀냈다

그 조각들은 관테(帶輪), 세움장식(立飾), 곁가지(樹枝), 달개(瓔珞)의 파편으로 완전하지는 않지만 대강의 모습은 복원할 수 있었다둥근 모양을 잡아주는 관테는 전체의 1/5 정도만(10) 남아 있었다그 위에 붙은 세움장식에서 곁가지가 뻗고 끝은 새의 부리처럼 아래로 뾰족했다. 세움장식과 곁가지에는 둥글고 오목한 달개가 금동실에 달려 관을 쓰고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면서 화려함이 돋보이는 방식이었다.

대성동 29호분의 금동관은 완전한 모습으로 출토된 부산 복천동 11호분의 금동관(보물 제1922, 2016년 지정)과 모양이 매우 비슷해 금관가야 관의 원형을 추정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다만 대성동이 복천동보다 100년 이상 앞선 가장 오래된 가야 왕관임은 분명하다.

 

금관가야 관, 대가야 관

후기가야 시기인 5~6세기 동아시아는 황금의 시대로 통한다. 신라는 황금의 나라로 불렸다. 신라의 관들이 한자 자의 세움장식을 기본으로 했다면, 가야의 관들은 다양한 형태의 세움장식을 통해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그런 점에서 대가야의 관은 금관가야 관과 또 다르다.

대가야의 왕릉인 지산동 32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보물 제2018, 2019년 지정)이 대표적이다. 그 가장자리에는 대칭으로 파도형태의 점줄무늬(點列文)가 세밀하게 찍혀 있다관테 중간에 큼지막한 광배(光背, 불상 뒤 광명을 상징하는 장식) 모양의 세움장식을 못으로 고정하고 세움장식 양쪽에는 자형의 곁가지, 그 끝은 보주(寶珠, 불길이 타오르는 형상의 구슬)로 마무리했다

대가야 관은 일본 후쿠이(福井)현의 니혼마츠야마(二本松山)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과도 비슷해서 왜와의 문물교류 연구에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다양한 형태의 가야 관

가야의 관 중에는 출토지가 불분명한 것이 있다. 하나는 삼성 리움미술관에서(국보 제138, 1971년 지정), 또 하나는 일제강점기 오쿠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가 일본으로 반출한 뒤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일본에 있는 관은 경상남도에서 가져갔다는 설이 전해진다

고고학자들은 2개 모두 가야의 금관(金冠)으로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이 유물들은 금관가야와 대가야 관의 전형적인 형태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를 두고 고대 장신구 연구의 대가인 모 교수는 가야의 왕권과 집권력이 약해진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필자는 여러 왕들의 다양한 취향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조금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앞으로 가야 왕릉에서 금관, 금동관이 더 출토된다면 그 이유를 추적할 수 있지 않을까?

 

 

김수환 경남도청 가야문화유산과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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