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연마

무예 연마

1565년 8월, 이순신은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方震)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방진은 무관출신으로 보성군수를 역임한 후 은퇴하여 향리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었는데, 그의 슬하에는 무남독녀만 있었다. 그는 무인으로서 호방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자 상당한 재력가이기도 했는데, 이순신의 품성과 자질을 높게 평가하여 자기 딸과의 혼사를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순신이 결혼 한 후에는 무관직을 적극 권유하였다.
이후 이순신은 장인의 영향을 받아서 붓을 던지고 22세부터는 본격적으로 무예를 연마하였다. 그리고 10년간 준비를 한 끝에 가까스로 무과에 급제했다.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무인의 자질을 타고 났지만 집안 사정은 타고난 무인의 기질과 재능을 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특히 조선에서 무인의 대접은 문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에 몰락한 가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문인의 소양이 더 필요했다.
결국 이순신은 20여 년간 유교적 소양을 풍부하게 쌓은 뒤에 10여 년간 자발적이고 치열한 노력을 통해서 무인의 길로 들어선다. 그 결과 이순신은 유교적 소양을 풍부하게 가진 무인이 되었다.

이순신의 무인적 자질을 뒷받침하는 사례로 무과 급제한 직후 선영에 갔을 때 기울어진 석인상을 세웠던 일이 있다. 당시 선영의 석인상이 기울어져서 하인들 수십 명이 세우려고 했는데 제대로 되지 않자 이순신이 하인들을 물리치고 청포를 입은 채 등에 짊어지고 바로 세웠다는 것이다. 이를 지켜 본 사람들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만약 이순신이 신체가 장대하고 본래 힘이 세었다고 한다면, 그것을 보고서 이순신은 힘이 장사다 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힘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정신력이라고 평가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이순신은 힘이 없어 보이는 선비같은 외모로 무인의 천부적인 신체 조건은 갖추지 못했지만 정신력은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이순신에 대해 강건한 무인이 아니라 단아한 선비의 외모를 가졌다고 한 유성룡의 평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정면에서 바라보는 이순신표준영정 이순신표준영정

이순신이 무예를 닦던 장소는 그가 사는 집 뒤에 위치한 방화산(芳華山)이나 집 앞의 나지막한 야산이었다고 한다. 활쏘기는 집 앞 은행나무 아래에서 야산을 향해서 쏘았고, 말타기는 방화산 꼭대기의 평평한 장소를 중심으로 하여 주위의 능선을 달렸다. 그가 무예를 익히던 곳에는 ‘궁터’(이순신이 활을 쏘던 곳)나 ‘치마장’(馳馬場, 이순신이 말을 타고 훈련을 하던 곳)이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이 궁터에서 ‘이순신은 임금이 있던 북쪽을 피해 남쪽을 향해서만 활을 쏘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무예를 익히는 데에 있어서도 스스로를 절제하였으며 위엄을 갖추어 행동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