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직생활

관직생활

동구비보 권관
무과에 급제한 이순신이 처음 관리생활을 시작한 곳은 함경도에 있는 삼수(三水)이다. 삼수는 조선시대의 귀양지 중 1급에 해당하는 제주도 지역에 버금가는 가장 멀고 험한 벽지였다. 그러한 곳에 발령받은 그의 보직은 종9품인 동구비보(東仇非堡)의 권관(權管)이었다. 이 지역은 국경에 근접한 거리에 위치한 곳이어서 종종 여진족이 침범하기도 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권관으로서 그 지방에 보(堡:자그마한 요새)를 설치하고 백성들을 보호하는 일종의 수비대장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했던 것이었다.

당시 함경감사(咸道監司 : 종2품)였던 이후백은 자신의 관할지역의 여러 진(鎭)을 순행하면서 훈련과 군기를 점검하였는데, 특히 변방의 각 장수들에게 활쏘기를 시험하여 성적이 좋지 않은 장수들에게는 무거운 벌을 내리는 등 엄격하였다. 이렇듯 진영과 군기관리에 엄정한 감사였지만 이순신에게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순신이 권관으로 지휘하고 있는 동구비보가 여느 보(堡)보다도 규율이 엄중하고 나무랄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순신은 감사를 맞아 이렇게 건의하기도 했다.
사또의 형벌이 너무 엄하여, 변방 장수들이 손발 둘 곳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대 말도 옳으나, 난들 어찌 옳고 그른 것을 가림 없이 그러하겠는가

이후백은 건의를 이해하고 받아들였으며 그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이순신의 실력과 더불어 동료들의 고충을 헤아릴 줄 아는 동료애에 감복했기 때문이다.
훈련원봉사
함경감사의 신임을 받으며 3년의 임기를 마친 이순신은 종8품의 한성 훈련원 봉사(奉事)로 승진되었다. 훈련원에서는 군사들의 인사ㆍ시험ㆍ훈련ㆍ교육 등에 관한 일을 담당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이순신은 인사에 관한 업무를 수행하였다.

훈련원에는 직속상관인 병조정랑(兵曹正郞 : 정5품) 서익(徐益)이 있었다. 그는 이순신보다 나이가 세 살 많았으며, 이율곡과도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그런 그가 이순신에게 인사청탁을 해왔다. 자신의 친지 한 사람에 대하여 규정을 무시하고 참군(參軍 : 정7품)으로 올려달라고 말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규율에 어긋나는 처사였기 때문에 이를 단번에 거절했다.
아래 있는 자를 까닭 없이 끌어올리면 당연히 승진되어야 할 사람이 천거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공평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부당한 청탁이 거절당하자 서익은 상관으로서 부하인 이순신에게 앙심을 갖게 되었다. 이를 보고 들은 훈련원의 동료들은 모두 그것을 통쾌하게 여기기도 했다. 이와 같은 공명정대함과 인격은 종종 서익과 비교되곤 했으며, 이로 인해 두 사람이 충돌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순신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며 눈여겨 지켜보는 사람도 있었다.

병조판서였던 김귀영(金貴榮)은 이순신의 인품을 높이 사고, 그를 자신의 서녀(첩의 딸)와 혼인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벼슬길에 갓 나온 사람으로서 어찌 권세의 집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이 제안마저도 거절하였다. 이에 김귀영도 노여움은커녕 오히려 그에 대해 더욱 더 이해하고 아끼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정승 말이 죽은 데는 (문상을) 가도 정승 죽은 데는 (문상을) 안 간다.’는 속담이 있다. 권력을 가진 자에 대한 지나친 아첨과 기회주의를 비판하는 말처럼, 당시 사회는 세도가와 인척관계를 맺음으로써 입신과 출세의 길을 찾고 세력을 형성하려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러한 부당한 권력욕에는 추호도 관심과 욕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편 병조정랑을 비롯한 상관들의 밑에서 훈련원 봉사의 임무를 수행하고 자신의 공명정대함을 펼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때문에 이순신은 훈련원에 부임한지 8개월 만에 인사조처를 당하게 되었다. 당시 봉사와 같은 일반적인 관리의 임기가 2년 이기 때문에 예외적인 조치로 서익과의 관계가 영향을 받은 듯하다.
충청병사 군관
이순신은 같은 해 10월 충청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 종2품)의 군관(軍官)이 되어 충청도 병영이 있는 해미(海美)로 가게 된다. 해미는 원래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을 합쳐 해미(海美)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곳이다.

이순신은 그곳에서 근무하는 동안 방에 옷과 이부자리만을 두어 청렴하게 생활하였다. 당시 생활에 대해 《행장》에는 이렇게 언급되어 있다.
거처하는 방에는 다른 아무것도 없고, 다만 옷과 이불뿐이었다. 휴가를 얻어 고향의 부모님을 뵈러 갈 때는 반드시 남의 양식을 담당 병사에게 돌려주었는데, 병사들은 그의 철저함에 경의를 표하였다.

어느 날 병마절도사가 술에 취하여 이순신의 손을 잡고 다른 군관의 집을 사사롭게 찾아보자고 했다. 이순신은 그의 잘못을 지적하며 거절했고 병마절도사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상관이라 하더라도 그릇된 행동에 대해서는 분명히 지적하는 성격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발포 수군만호
1580년 6월, 이순신은 36살의 나이로 전라도 고흥의 발포 수군만호(水軍萬戶 : 종4품)가 되었다. 지금까지 육지에서의 군관생활만 하던 그가 처음으로 수군의 지휘관을 맡게 된 것이었다.
당시 전라감사 손식(孫軾)은 이순신에 대한 잘못된 풍문을 이미 듣고 오해하였기에 그에게 벌을 주어 군기를 잡으려는 구실을 찾고 있었다. 하루는 순시 도중 능성(綾城)에 오르게 되자 이순신을 나오라 하여 《진설(陣說 : 조선시대 진법을 해설한 병서)》을 강독케 하였다. 이순신은 침착하고 조리 있게 설명을 마쳤다. 이에 감사는 다시 진을 치는 진도(陳圖)를 그리라 명하였다. 진도 역시 정확하게 그려내자, 손식은 그제야 자신의 오해를 인정하고 이순신의 손을 잡으며 “내가 잘못하였소. 일찍이 그대를 바로 알지 못했던 것이 후회스럽소.”라고 말했다.
이후로 손식은 이순신에 대해 이전과 달리 정중하게 대우하였다. 하지만 이순신과 상관들의 갈등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의 직속상관이 되는 전라좌수사 성박(成博)이 군관을 시켜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관사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나라의 재산인 나무를 벨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를 거절했다.
저 관사에 있는 오동나무는 나라의 물건입니다. 나라의 물건은 사사롭게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저 나무는 오래된 것으로 하루아침에 베어 버릴 잡목이 아닙니다.
결국 성박은 자신의 뜻대로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들지 못했다.

얼마 후 성박의 뒤를 이어 이용이 새로운 전라좌수사로 부임해 왔다. 그 역시 이순신에 대하여 좋지 못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용은 자기 관하의 5포(五浦 : 발포, 여도, 사도, 녹도, 방답)를 점검하였다. 다른 4개의 포구는 이탈자가 많은 반면 이순신이 지휘하는 포구에는 겨우 3명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용은 조정에 이순신이 지휘하는 포구의 이탈자만을 적어 장계를 올렸다. 이런 부당함에 이순신은 다른 4개 포구의 결과를 조사하여 보고하려 했으며 이에 당황한 이용이 즉시 장계를 회수하였다.

특히 이용은 전라감사와 함께 부하장수들의 성적과 실력을 평가할 때 5개의 포구 중 이순신을 가장 낮게 평가하였다. 당시 이순신보다 1살 연상이며 전라도 도사(都事)로 부임하고 있던 조헌(趙憲)은 이와 같은 고과내용을 보자 부당한 처사라고 판단하고 항의했다.
듣건대, 이순신의 군사 다스리는 법이 우리 도에서는 가장 으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른 모든 장수들을 그의 아래에 둘지언정, 그를 도리어 나쁘게 평정한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조헌의 항의로 이순신에 대한 왜곡된 평가는 없었던 일로 처리되었으며, 훗날 이용도 이순신의 충직함과 의로움을 깊이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거듭된 상관과의 시련은 결국 이순신을 파직에 이르게 만들었다. 1582년 2월 변방의 군기물을 감찰하는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이 파견되는데, 그는 다름 아닌 지난 훈련원시절에 부당한 인사청탁을 거절당했던 서익(徐益)이었다.

과거 훈련원 시절의 일을 두고 앙심을 품고 있었던 서익은 발포의 군기물 감찰에 대한 결과를 거짓으로 작성하여 군기가 부실하다고 보고했다. 때문에 이순신은 발포만호로 부임한지 18개월 만에 자리에 파직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이순신의 파직이 정당한 사유가 아닌 서익의 개인 감정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훈련원 봉사
발포만호에서 파직되고 넉 달이 지난 1583년 5월, 이순신은 전에 근무한 경험이 있던 한성의 훈련원 봉사로 복귀하게 되었다.

인사조치가 매우 불합리한 조치임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해 12월 병조판서였던 이율곡이 이순신을 알아보고 유성룡을 통해 만날 것을 청하였고, 유성룡 역시 이순신의 입신을 위해 그렇게 하길 권유하였지만 이순신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나와 율곡은 같은 덕수이씨 문중이라고는 하지만, 그가 병조판서의 자리에 있을 때 만난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오.

아무리 같은 문중이라 하더라도 당시 군사와 무관의 업무를 총괄하던 병조의 수장인 이율곡을 만난다는 것은 정당하지 않은 처신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후 훈련원 관직생활이 1년 2개월이 지날 즈음 예전에 상관이었던 이용이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게 되면서 이순신을 군관으로 임명했다. 전일 이순신의 강직한 성격과 충실함을 높이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건원보 권관
1583년(선조 16년) 10월, 이순신은 함경도의 경원에서 남쪽으로 40리쯤 떨어진 변방 건원보(乾源堡)의 권관으로 보직되어 부임하게 되었다. 경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고을로서 여진족들이 살고 있으며, 그들이 수시로 백성들을 해치거나 재물을 약탈하기도 했다. 이곳은 과거 고려 때 명장이었던 윤관에 의해 여진족들이 정벌되기도 했었다.

이 지역에서 여진족들을 쫓아내기로 결심한 이순신은 계책을 이용하여 오랑캐들과 우두머리인 울지내(鬱只乃)를 유인하였고, 미리 배치한 복병으로 그들을 모두 토벌하였다.《이충무공전서》의 〈행록〉에는 그 경위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공이 부임하여 방책을 쓰는데, 유인작전으로써 울지내로 하여금 오랑캐를 데리고 오게 해놓고, 공은 복병을 풀어 그들을 사로잡았다.

이러한 전과에 대해 조정에서 이순신에게 큰 상을 내리고자 하였으나 북병사(北兵使) 김우서가 자신과의 아무런 논의 없이 독단적으로 작전을 수행했다는 장계를 올려 반대함에 따라 포상은 취소되었다. 대신 이순신은 건원보에 있는 동안 임기가 끝나 참군(정7품)으로 승진이 되었다.
이순신이 오랑캐를 생포한 다음 날인 11월 15일, 그의 부친인 정(貞)이 향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에게 부친의 부고는 다음 해 1584년 1월에 전해졌다. 이순신을 아끼던 우찬성(右贊成) 정언신(鄭彦信)이 상중의 고통으로 그가 몸을 사리지 않을까 걱정하여 사람을 보내 위로하였다. 또한 서두르지 않고 성복(成服 : 초상이 났을 때 처음으로 상복을 입는 일)을 하고 상주의 차림으로 갈 것을 권했지만, 이순신은 서둘러 고향으로 내려간 연후에야 성복을 하고 3년 상을 치렀다.
그러나 거듭되는 여진의 변방 침입으로 인해 조정에서는 그를 기용하기 위해 상중에도 탈상시기를 자주 물어왔다.
조산보만호와 녹둔도둔전관
탈상을 한 후 1586년 1월, 42세의 이순신은 궁중의 말과 수레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사복시(司僕侍)의 주부(主簿)로 임명되었고, 16일 만에 다시 함경도 경흥의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 : 종4품)로 전근되었다. 변방을 끊임없이 침입하는 오랑캐들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최적의 인물로 이순신만한 장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유성룡이 이순신을 조산보만호로 추천했다.

또 이듬해인 1587년 8월에는 함경도 관찰사 정언신(鄭彦信)의 추천으로 녹둔도(鹿屯島)의 농토까지 관리하는 둔전관(屯田官)을 겸하게 되었다. 녹둔도는 조산보에서 동쪽으로 20리 정도 떨어진 섬이며 두만강이 동해로 흘러가는 여울목이기도 하다.

이순신은 녹둔도에서 병력이 적은 것을 염려하여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에게 군사를 증원시켜줄 것을 거듭 요청했지만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얼마 후 여진족의 갑청아(甲靑阿), 사송아(沙送阿) 등이 병력을 이끌고 둔전의 울타리를 포위하고 공격을 해왔다. 당시 요새 안에는 10여 명의 병사들만이 있었으며 나머지 병력은 모두 둔전의 벼를 수확하고 있었다. 적진에서 붉은 모전(毛氈)을 입은 적병이 앞장 서 달려왔고 이순신은 유엽전(柳葉箭)으로 그들을 쓰러뜨렸다.

이에 적들이 모두 놀라 겁을 먹고 달아났으며 이순신은 이운룡(李暈龍)과 함께 뒤를 추격하여 포로로 잡힌 백성 60여 명을 구출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로 수호장인 오형(吳亨)과 감독관이었던 임경번(林景藩) 등이 전사를 하고 이순신도 오른쪽 다리에 화살을 맞는 부상을 입었다. 그렇지만, 조선군도 오랑캐 두목과 적군의 목 3개를 베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 전투의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와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한 이일이 조선 측의 피해만을 거론하며 이순신을 처벌하고자 했다. 이일의 거짓보고를 받은 조정은 이순신의 처벌을 논의하였고, 지난날 그의 공적을 고려하여 백의종군(白衣從軍 : 일체의 관직과 벼슬 없이 군대를 따라 참전케 하는 처벌)을 명하였다.
이후 이순신은 다음해 1월에 벌어진 여진과의 전투에서 그들의 거점인 시전부락(時錢部落)을 점령하는 공을 세워 다시 복권되었고, 그해 6월 본가가 있는 아산으로 내려갔다.
전라관찰사 군관으로부터 정읍현감
1589년 2월, 함경감사였던 이광은 전라도 관찰사가 되면서 이순신을 자신의 군관 겸 조방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순신은 발포만호에서 파직된 지 7년 만에 다시 벼슬에 오른 것이었으며 그 해 11월에는 선전관(宣傳官)을 겸하였고 다시 12월에 전라도 정읍현감(종6품)으로 발령되어 부임하였다.

그는 정읍현감에 부임하자마자 태인현(泰仁縣)의 현감까지 겸임하게 됐다. 이순신은 현감으로 봉직하게 되면서부터 요절한 형 희신ㆍ요신의 자식들과 모친을 부양했다. 당시 지방관리들이 식솔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는 것을 남솔(濫率)이라 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였지만 이순신은 조카들을 자신의 자식들만큼이나 아끼고 사랑했으며 그들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거두었다.

한편 이순신이 정읍현감으로 부임하기 이전에 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지내던 전라도 도사(都事) 조대중(曹大中)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연루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의금부는 금부도사를 하여금 조대중의 집을 수색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이순신이 보냈던 편지도 함께 압수당했다.

마침 이순신이 차사원(差使員 :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임시로 보내던 직원)으로서 서울로 올라가는 도중 그 금부도사와 마주쳤다. 평소 이순신과 친분이 있었던 금부도사는 행여 그가 이 사건과 관련하여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염려하여 그 편지를 따로 빼내려 했다. 그렇지만 이순신은 “그 편지는 서로의 안부를 물었던 것일 뿐이오. 이미 압수를 당하여 공물이 된 것을 사사로운 이유에서 빼낸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오.”라고 하며 거절했다. 이처럼 이순신은 개인의 이익 혹은 불이익 때문에 공무에 관여하는 것을 극도로 자제하였다.
전라좌수사
1590년 이순신은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종3품)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시 대간들이 ‘변방 수령은 만 1년이 지나야 옮길 수 있다’는 규정을 들어 반대하였다. 다시 한 달 뒤인 8월에는 만포진 수군첨절제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너무 빨리 진급을 시킨다는 이유로 취소되었다. 그러다가 다음해인 2월, 조정은 이순신을 진도군수(종4품)로 임명했다가 부임하기 직전 다시 가리포 수군첨절제사에 임명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부임하기 전에 전라좌수사(정3품)로 승진되어 정읍에서 곧장 임지로 부임하게 됐다.

이처럼 이순신이 급속히 진급하게 된 것은 조정의 국방강화에 따른 무관의 불차탁용(不次擢用 : 경력 순서를 따지지 않고 능력있는 자를 등용한다) 원칙에 따라서 이루어졌다. 당시 선조는 비변사에 명하여 각기 장수의 재목을 천거토록 하였는데, 그의 능력을 잘 알고 있던 유성룡이 권율과 함께 이순신을 추천했으며, 이에 따라 관리로서 정상적인 승진 순서를 뛰어 넘어 발탁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를 두고 사간원)에서 2회에 걸쳐 이순신의 승진에 대한 부당함을 말하지만,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선조의 강력한 의지 아래 이순신의 부임은 그대로 추진되었다.

이후 이순신은 부임하자마자 전라좌수영의 편제에 속하는 5포(사도·방답·여도·녹도·발포)와 5관(순천·보성·낙안·광양·흥양)을 순시하면서 전선·무기·병사(兵舍) 등을 점검하고 미비된 부분을 보수하였다. 바로 이때에 임진왜란에서 수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거북선도 건조되었다.

진영을 점검하고 군비를 보강하는 한편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군사들의 기강이었다. 이순신이 부임할 당시 휘하의 장졸들은 고된 근무와 훈련에 불만을 갖고 있었으며, 개인의 전투력관리에도 소홀하였다. 때문에 그는 수영의 기강확립에 우선을 두고 군무에 태만한 관리와 군사들에게 엄중한 처벌을 내렸고, 각 포(浦)와 진(鎭)의 지휘관들에게 활쏘기 시험을 수시로 실시하여 전력을 강화시켰다.

이순신은 각 포구와 진지의 성(城)과 보(堡)를 돌아보며, 시설의 허술한 데가 발견되면 즉석에서 이를 보수하라고 지시하였다. 본영(本營)인 여수에도 연대(煙臺)와 성보(城堡) 쌓았는데, 좌수영의 방어시설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에 부임하기까지 전문적인 수군 업무를 관장하였던 기간은 짧았다. 하지만 발포만호를 역임하면서 얻은 경험을 최대한 살려 남해안의 해상 지리를 면밀히 파악하였다. 또한 지형지물에 맞춰 수군배치를 재편해 나갔다.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옥포에서의 첫 해전을 시작으로 임진년에 4차례 출동하여 일본 수군을 격퇴하였다. 조선 수군은 경상우도 ․ 전라좌도 ․ 전라우도 수군의 연합함대였으나 실제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지휘하에 있었다. 1차 출동에서 옥포해전 등, 2차 출동에서 당포해전 등에서 승리하고, 3차 출동에서 한산대첩으로 일본 수군의 전의를 완전히 꺾었다. 이후 4차 출동에서는 적의 교두보인 부산을 공격하여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로써 이순신은 남해의 제해권을 확보하여 일본군의 해상병참선을 차단ㆍ봉쇄하고 조선의 군사 잠재력 동원 기반인 호남을 적의 침공으로부터 보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해를 통한 일본군의 수륙병진 공격 기도를 분쇄함으로써 적의 조선 침략ㆍ정복을 저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적기에 수행하였던 것이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1593년에도 재차 부산과 웅천에 있던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히 일소한 뒤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그러나 1597년에 파직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까지 몰렸으나 겨우 죽음을 면하고 두 번째 백의종군을 했다.

후임 원균이 7월에 칠천량해전에서 일본군에 참패하자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다. 이후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죽도록 힘을 다해서 싸우면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장계를 올린 후 13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나아가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을 펼쳐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명량대첩) 이 승리를 통해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1598년 11월,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병사(病死) 소식을 듣고 철군하려 하였는데, 이에 이순신은 일본군의 퇴로를 막기로 하였다.

11월 19일, 이순신은 명나라 제독 진린과 연합하여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고, “방패로 나를 가려라.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라는 말을 남기고 전사하였다.(노량해전). 이때 이순신의 나이는 54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