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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경남역사

[아하! 경남역사]가야유산 기획❷ 아라가야는 왕국(王國)이었다!


 

약 2000년 전, 경남 곳곳에 분포했던 변한의 열두 나라에는 신지, 험측, 읍차 등의 지배자가 있었다. 그중 아라가야의 전신인 안야국의 지배자는 축지(蹴支)라 하여 높여 불렀다. 변한의 소국들이 가야 각국으로 성장하는 4세기 무렵, 안야국의 최고지배자는 당연히 왕(王)의 자리에 올랐을 텐데 아라가야는 금관가야, 대가야와 달리 왕력(王歷)이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서기(552년)에는 ‘안라(아라가야)왕’이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아라가야에도 왕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함안 말이산고분군(사적 제515호)에 왕과 최고 귀족의 거대한 무덤과 함께 중하위 지배층의 무덤들도 분포해 있다. 아라가야는 왕과 귀족들의 상하관계 속에서 정치, 군사, 외교 등이 이루어지는 ‘왕국(王國)’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연히 발견된 가야시대 성토 흔적

지난 4월 함안군 가야읍 가야동 일원에서 아라가야사를 획기적으로 밝힐 중요한 단서가 나왔다. 한 농민의 경지정리 과정에서 고운 점토와 모래, 목탄 등을 켜켜이 쌓아 올린 성토(盛土) 흔적이 드러났다. 함안군 학예사는 아라가야의 왕궁 유적임을 직감하고 관계 전문가들의 현장조사를 요청했다. 그 결과 가야시대의 성토 흔적으로 밝혀졌다.

가야동 일대는 말이산고분군으로부터 북서쪽으로 불과 1㎞ 거리에 위치한 나지막한 구릉이다. 과거부터 아라가야의 왕궁터로 전해져 왔으나 발굴된 적이 없어 ‘추정 왕궁지 유적’ 등으로 불리어 왔다. 이곳은 조선시대 지리지인 함주지(咸州志, 1587년)에는 ‘가야국의 옛 도읍터’로,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 1860년대)에는 ‘옛 나라의 터’로 기록되는 등 왕궁지로 유력했던 것이 사실 이다.

 

 

아라가야 왕성(王城), 실체를 드러내다

지난 5~6월 여름의 길목에서 ‘추정 왕궁지 유적’에 대한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의 긴급발굴조사가 실시됐다. 전체 유적에 비해 좁은 면적(1300㎡)을 대상으로 한 발굴조사였지만, 그 결과는 실로 놀라웠다. 앞서 발견된 성토 흔적이 왕궁의 방어시설인 토성(土城, 흙으로 쌓은 성곽)으로 판명됐다. 토성의 규모는 높이 8.5m, 너비 20~40m로, 김해 봉황토성과 합천 성산토성 등 그간 발굴된 가야 토성은 물론 백제 몽촌토성의 규모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토성에는 성토 과정 중 성벽이 밀리지 않도록 나무기둥을 설치하거나 판축(板築, 널판을 대고 내부에 흙을 쌓아 올림) 공법을 적용하는 등 정교한 토목공사의 흔적이 확인됐다. 그 상부에서는 지름 30㎝의 나무기둥을 1m 간격으로 2열 배치한 목책 흔적도 발견되었다. 또 토성 안 평지에서는 움집방식으로 만든 건물터 8동이 확인돼 이곳이 단순한 방어시설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은 수십 조각의 가야 토기편이 전부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이번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가야 토성은 왕궁을 보호하기 위해 축조한 왕성임이 분명하고 개발에 의한 유적 훼손이 거의 없어 가야 왕성의 실체를 밝힐 최고의 유적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아라왕궁지를 찾아라

그렇다면 아라가야 왕이 거처했던 왕궁지는 어디에 있을까?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왕궁 후보지는 큰 가야동과 작은 가야동으로 불리는 두 개의 마을이 자리한 곳이다. 이곳에는 지금도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어 장기간의 계획과 치밀한 발굴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다행히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는 연차별 학술조사를 계획하고 있다.

함안군은 유적의 학술적 가치가 밝혀지는 대로 문화재 지정과 보존관리 계획을 세울 예정이라고 한다. 1500년 세월 땅속에 잠자고 있던 가야 왕국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기를 기대해 본다.

참고 함안 아라가야 추정 왕궁지 발굴조사 현장설명회 자료(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18)

김수환 경남도 가야사연구복원추진단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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