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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

[행복한 여행]여행 하나 노래 둘

「처녀 뱃사공」찍고 「돌아와요 충무항에」


어린 시절 처녀 뱃사공의 추억

추억이 있다. 모두 춥고 힘들게 살던 때였다. 지금으로 치면 골목 콘서트라고나 할까. 어릴 때 살던 동네의 골목에는 해거름만 되면, 장난기 많은 어른이 꼬마들을 모아놓고 노래를 시키곤 했다. 1등에 라면땅한 봉지였으니 누구나 군침을 흘릴 만했다. 당시 라디오엔 남진과 나훈아의 노래밖에 나오지 않아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가슴 아프게, 사랑은 눈물의 씨앗정도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밤무대 악사였고 어머니가 가수였던 대여섯 살 먹은 춘희는 달랐다. 그녀는 무대에 서자마자 꺾어지는 창법으로 노래를 불러 라면땅을 차지했는데, 알고 보니 그 노래가 처녀 뱃사공이었다.

그 후부터 지겹도록 듣고 부른 처녀 뱃사공은 어머니가 어린 나를 데리고 할머니 댁으로 갈 때 부르던 노래요, 아버지가 술기운에 안방에서 부르던 노래요, KBS 가요무대에서 단골로 나오던 노래요, 심지어 필자가 대학 MT 때 떠밀려 부르던 노래가 되었다.

 

처녀 뱃사공배경, 함안 악양나루터

선친의 고향 함안의 악양생태공원을 찾은 날은 평일이었지만 사람들로 넘쳐났다. 깊어가는 가을, 날씨는 화창했다. 탁 트인 전망과 지척에 도도히 흐르는 강과 코스모스 특히 핑크뮬리 군락을 배경삼아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다. 주차장에서 십 분여를 가니 노랫말 윤부길, 작곡 한복남에 황정자가 노래한 처녀 뱃사공노래비가 보였다. 윤부길이 누구던가. 60, 70년대 가요계를 휘어잡은 윤항기, 윤복희 남매의 아버지이자 낙랑악극단 단원이면서 당대 원맨쇼의 일인자였다.

그는 1959년 이곳 나루터에서 실제 처녀 뱃사공을 만나 사연을 듣고 노랫말을 만들었다. 물론 일제 강점기 때 작부였던 이화자가 부른 목단강 편지(조명암 작사, 박시춘 곡)가 이 노래의 원조라는 주장도 있지만, 원작자가 표절 제기를 하지 않았으므로 처녀 뱃사공은 윤부길과 한복남이 만든 노래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노래비를 보고 난 후, 나루터와 강이 잘 보이는 악양루에 올랐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악양루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963년에 재개축한 것으로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의 정자다. 남강과 넓은 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덕분에 방문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과연 정자 앞에 서니 시원한 바람이 가을 뙤약볕으로 인한 땀과 홍진(紅塵)을 모조리 씻어 내리는 것 같았다. 난간에 기대어 강을 바라보자, 윤부길이 만났던 처녀 뱃사공, 그녀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변변한 땅이 없었던 처녀의 집은 매우 곤궁했다. 오빠마저 군에 가버리고 늙은 부모를 봉양할 수 없었던 처녀는 먹고살기 위해 노를 잡았다. 손이 터지고 어깨가 바스러질 듯한 고통 속에서도 군에 간 오빠를 기다리며 생계를 이어간다. 지금으로 치면 소녀가장이던 처녀는 그래도 삶의 희망을 놓지 않으려 노를 저을 때마다 노래를 부른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배경은 통영

통영 서피랑공원에 가는 날은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사실 통영이란 지명보다 이쪽 김밥 앞머리에 붙은 옛 이름인 충무가 훨씬 더 정겹고 익숙한 나는 서피랑 이야기 터널입구에서부터 마음이 설레였다.

문학이라는 것은 라는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는 라는 질문을 멈출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문학의 골자입니다.라고 쓴 박경리 선생의 현판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문학이 아니라 한 시대를 풍미했던 노래를 이야기하고 싶다.

독자 여러분들은 돌아와요 충무항에를 아시는가? 아마 하모 들어봤제라는 분도 있겠지만, 대다수는 무슨 소리? 돌아와요 부산항에라고 할 것이다. 하긴 부산에서 나고 반세기를 살면서 나름 기타 좀 만졌다는 필자도 사실, 조용필이 히트시킨 그 노래의 원작이 돌아와요 충무항에인 줄 꿈에도 몰랐다.

 

원작은 요절가수 김성술의 돌아와요 충무항에

서피랑공원 언덕을 올라 정자 오른쪽 밑으로 가니 이 노래를 최초로 불렀던 가수의 노래비가 있었고 노래가 흘러나왔다. 뿌연 안개 너머로 동양의 나폴리라는 별칭을 가진 통영 일대와 바다가 보였다. 김성술, 그는 1946년 통영군 산양면 남평리 금평(야소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노래에 남다른 관심이 있던 그는 1967동백꽃이 필 때면으로 데뷔했다.

25세 때인 1970년에는 자신이 작사하고 부산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황선우가 작곡한 돌아와요 충무항에를 발표했지만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이듬해 대연각호텔 화재 때 사망했다. 천재적인 가수들은 왜 이리 일찍 이 세상과 작별을 하는지, 그를 이어 주옥같은 노래를 만들고 부른 김정호, 유재하, 김광석이 애석하게도 요절했다.

 

청춘의 기억 속 70년대 대히트곡

유족들은 사고 이후 고인을 생각나게 하는 음반을 모두 폐기 처분했지만 작곡가 황선우는 1972년 조용필, 김석일 등 여러 가수에게 녹음시켰다. 결국 이 곡을 1976년 조용필이 트로트 록으로 리메이크해 히트시키면서 온 국민이 애창하는 국민가요가 되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사춘기였던 나는 누나가 부산의 영도 친구 집에 갈 때면 하릴없이 따라나서곤 했다. 그 집에 내 또래의 여학생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방에 라디오가 있었는데 그때 수시로 흘러나오던 노래가 돌아와요 부산항에였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당시 그 집의 분위기, 그 여학생의 웃음소리가 몽환적으로 떠오른다. 12줄 기타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조용필을 보며 나는 기타를 처음 만졌다. 오늘은 통영을 너무 사랑한 젊은 가수 김성술, 유년 시절 그가 살던 집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곳 서피랑공원에서 고즈넉하게 그를 기린다. 

 

 

·사진 이인규 가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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