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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향기

[문화의 향기]횃불을 닮은 예술가 - 주정이 판화가의 꺼지지 않는 창작열

경남도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각인(刻印)-한국근현대목판화 100의 참여작가 중

김해에서 활동하고 있는 주정이 판화가의 작업실을 찾았다.

여든을 바라보는 고령에도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창작열을 불태우고 있는 그에게

자신만의 작품세계와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는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김미영 사진 김정민




예술가의 불씨가 머문 자리를 찾아

김해시 생림면의 산속에 자리한 작업실 찾기는 쉽지 않았다. 헤매고 헤매다 간신히 마당 깊은 집으로 들어섰다. 위채와 아래채 사이의 작은 별채 통창 너머로 한 어르신이 손짓한다.

조그만 여닫이문을 열고 마주한 주정이(78) 판화가의 희고 긴 눈썹과 무심한 듯 형형한 눈빛이 남다른 아우라를 발산한다.

두 평 남짓한 온돌방의 아랫목을 내주며 오는 길 힘들지 않았냐고 툭 던지는 말투에서 특유의 투박함과 따스함이 묻어있다. 덕분에 온돌의 온기가 퍼지듯 긴장이 스르륵 풀린다. 인터뷰를 잘 하지 않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하게 됐다며 농도 던진다. <경남공감>과 만날 운명이었는지 모르겠다며 한바탕 웃었다.

 

시사만화가, 사진가 거쳐 70년대 중반부터 판화가

주 작가는 열일곱에 일간지의 연재만화로 시작해 네 칸짜리 시사만화를 그리게 되었다. 신문 연재는 100여 회에 달하고 10권 정도의 만화책도 냈다. 그 후 월남전 참전을 계기로 사진의 기록성에 매료돼 사진가로 활동하다 1970년대 중반 판화로 장르를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40여 년간 그의 손으로 탄생한 판화작품만 1100여 점에 이른다. 판화가로 사는 삶을 택한 연유가 궁금하다. “유년 시절 연필을 깎는 느낌이 좋았다. 사각거리는 손맛의 느낌과 나무 향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오로지 나무가 좋아 판화가가 됐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이야기하는 내내 연필을 꼭 쥐고 있었다. 지금도 작품의 시작은 밑그림을 그릴 연필을 깎는 것부터 한다. 칼맛 나는 목판화를 고집하는 대가의 시작은 언제나 작은 연필 한 자루였다.

 

목판화는 한국 정서와 맞닿은 친환경적인 예술 장르

경남도립미술관 특별전 각인(刻印)-한국근현대목판화 100에 전시된 주 작가의 작품은 가로 35×세로 35cm 안팎의 소형 목판화 20여 점이다. 향토성 짙은 자연과 사람의 삶을 간결한 구도와 독자적인 칼맛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중에 작품 횃불이 디자인된 홍보 포스터가 주목할 만하다. 목판화 특유의 칼맛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고, 경남의 작가라는 상징성도 있어 대표 이미지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전시 기획자가 전한다.

작업실로 쓰고 있는 아래채로 자리를 옮겨 그의 작품 이야기를 들었다. 불 냄새가 난다 했더니 벽난로에 장작이 활활 타고 있어 운치를 더한다. 벽난로 옆에는 대량의 목판화 원판이 책처럼 빽빽하게 꽂혀있어 오랜 시간 작업에 매진해온 판화가의 작업실임을 짐작하게 한다. 먹을 머금은 판화 원판부터 스케치만 하고 내버려 둔 것, 반쯤 새기다 만 것, 쪼개진 것 등 창작의 산물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공간이다.

작품에 몰입할 때는 힘든 것도 없고 되레 정신이 맑아져 실수도 안 하게 된다는 주 작가는 목판화의 매력을 한국적인 정서를 담기에 어울린다. 나무, 한지, 먹물 등 모든 재료와 과정이 친환경적인 작업이라고 말한다.

 

마음 가는 대로작품 즐기는 참 예술인

주 작가는 완벽하게 계산된 작업을 원하지 않는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룩한 결과물은 인위적이고 여유가 없다며 가차 없이 난로 속으로 던져버리는 단호함이 있다. 그리고, 지우고, 새기고, 도려내는 작업 가운데 맛보는 의도치 않은 기대감이 좋단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는 듯 보이지만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어긋남이 없이 고독한 예술가의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중이다. 올해 서너 군데서 전시 출품 제의가 있어 검토 중이며, 틈날 때마다 끄적거리는 버릇은 여전해 그 생각들을 쏟아내느라 예술가의 불씨는 꺼질 줄을 모른다. 글 쓰는 능력 또한 남다른 그는 산문집도 더러 썼다. 한 글귀가 그의 예술관을 대변하는 듯하다.

 

                        

내 작업은 그리기와 지우기의 경계를 모색하는 여정이다. 포만의 거북함과 허기의 고통, 그리기의 절제와 사유의 압축, 그 눈금의 설정에 관심을 기울인다. 필요에 따라서는 박아낸 화면에 덧칠을 하거나 지우기도 예사이고 판목에 새겨진 원판이 단순한 밑그림으로 전락하는 것마저 개의치 않는다.”

- 산문집 <숫돌에 칼을 갈며> 본문 먼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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