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전서

충무공전서

<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임진왜란이 끝난 후 200여 년이 지난 1795년(정조 19)에 정조의 명에 따라 이순신과 거북선에 관한 자료를 총망라하여 수집·정리하여 간행되었다.

책머리에 정조의 윤음(綸音)을 비롯하여 교유(敎諭)ㆍ사제문(賜祭文)ㆍ도설(圖說)ㆍ세보(世譜)ㆍ연표를 싣고, 권1에 시ㆍ잡저(雜著), 권2∼4에 장계(狀啓), 권5∼8에 난중일기, 권9∼14에 부록을 수록하였다.
옆에서 바라보는 전라좌수영 거북선, 통제영 거북선  그림 전라좌수영 거북선, 통제영 거북선
이 책은 조선시대 출판문화의 표본 전적(典籍)과 이순신 전기(傳記) 자료 및 임진왜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이 책의 권수도설에는 ‘통제영귀선(統制營龜船)’‘전라좌수영귀선(全羅左水營龜船)’의 귀선도(龜船圖), 그리고 700자 정도의 ‘안설(按說)’이 실려 있다.
거북선의 제도에 관계되는 사료 중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기술된 자료이다. 이것은 물론 정조 때의 거북선을 나타낸 것이나, 숙종에서 영조 때의 거북선도 체제에 있어서는 대략 이와 비슷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언급된 거북선에 대한 설명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면 오른쪽에서 바라보는 통제영 거북선 - 이충무공전서에 있는 그림 통제영 거북선 - 이충무공전서
귀선의 제도에서 俗名을 本版이라 하는 底版은 10쪽을 이어 붙였는데 길이는 64자 8치이며, 머리쪽 넓이는 12자이고, 허리쪽 넓이는 14자 5치이며, 꼬리쪽 넓이는 10자 6치이다. 속명을 杉版이라 하는 좌우 舷版은 각각 7쪽을 이어 붙였는데 높이는 7자 5치이고, 최하 제 1판의 길이는 68자이며, 차례로 길이를 더하여 맨 위 일곱째 판자에 이르러선 길이가 113자이고, 두께는 다같이 4치씩이다.

속명이 荷版인 艫版은 4쪽을 이어 붙였는데 높이는 4자이고, 둘째 판자 좌우에 玄字砲 구멍이 하나씩 뚫려 있다. 속명이 역시 하판인 舳版은 7쪽을 이어 붙였는데 높이는 7자 5치이고, 윗넓이는 14자 5치이며, 아래 넓이는 10자 5치인데 여섯째 판자 한가운데 직경 1자 2치 되는 구멍을 들어 속명이 치(鴟)인 舵를 꽂게 되어 있다. 좌우 뱃전에는 속명을 信防이라 하는 난간(欄)을 설치하고, 난간 머리에 속명을 駕龍이라 하는 橫梁을 걸쳤는데 바로 뱃머리(艫) 앞에 닿게 되어 마치 소나 말의 가슴에 멍에 메인 것과 같다. 난간을 따라 판자를 깔고 그 둘레에 방패판(牌)을 둘러 꽂았으며, 방패판위에 또 속명을 偃防이라 하는 난간을 설치하였는데 舷欄에서부터 牌欄까지의 높이는 4자 3치이고, 패란 좌우에 각각 속명을 蓋版 또는 龜背版이라 하는 11개의 판자를 비늘처럼 서로 마주 덮고, 그 등에 1자 5치 되는 틈을 내어 돛대를 세웠다 뉘었다 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뱃머리에 거북머리를 설치하였는데 길이는 4자 3치, 넓이는 3자이고, 그 속에서 유황 염초를 태워 벌어진 입으로 연기를 안개같이 토하여 적을 혼미케 한다.

좌우의 櫓는 각각 10개씩이고 좌우 방패 판에는 각각 22개씩의 포 구멍을 뚫었으며, 12개의 문을 설치하였다. 거북머리 위에도 2개의 포 구멍을 뚫었고, 아래에 2개의 문을 설치했으며 문 곁에도 각각 포 구멍이 1개씩 있다. 좌우 覆版에도 또한 각각 12개의 포구멍을 뚫었으며 龜자 기를 꽂았다.

좌우 舖板 아래 방이 각각 12간인데 2간은 철물을 쟁였고 3간은 화포·궁시·창검을 갈라 두며 19간은 군사들이 쉬는 곳으로 되어 있다. 왼쪽 포판 위의 방 한 간은 船將이 쓰고, 오른쪽 포판 위의 방 한 간은 장교가 있는데 군사들이 쉴 때에는 포판 아래에 있고 싸울 때에는 포판 위로 올라와 모든 포구멍에 포를 걸어 놓고 쉴 새 없이 쟁여 쏘아댄다.

상고하건대 『충무공행장』에 이르되 “공이 전라좌수사가 되어 倭가 쳐들어오려 함을 알고, 큰 배를 지혜롭게 만들되(創智作) 배 위에는 판자를 덮고, 판자 위에는 十자로 좁은 길을 내어 사람이 겨우 다닐 만하게 하고, 모두 다 칼 송곳(錐刀)을 깔았으며, 앞은 용머리, 뒤는 거북꼬리이고, 총구멍은 전후좌우에 각각 6개씩으로 큰 탄환을 쏘며, 적을 만나면 거적으로 위를 덮어 칼 송곳을 가리어 선봉이 되고, 적이 배에 오르려 하면 칼 송곳에 부딪치며, 와서 덮치려 하면 일시에 총을 쏘아 가는 곳마다 휩쓸지 못하는 바가 없어, 크고 작은 싸움에 이것으로 공적을 거둔 것이 심히 많으며, 형상이 엎드려 있는 거북과 같으므로 귀선이라 이름을 지었다”라고 하였다.

明나라 華鈺의 『海防議』에 이르되 "조선의 귀선은 돛대를 세우고 눕히기를 임의로 하고 역풍이건 퇴조 때이건 마음대로갈 수 있다"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공이 창제한 배를 가리키는 것이 다. 그런데 모두 그 치수에 대하여는 자세히 말하지 않고 있다. 지금의 통제영 귀선은 대개 충무공의 舊制에서 나온 것이지만 역시 치수의 가감이 없지 않다.

충무공이 이 배를 창조한 곳은 실로 전라좌수영에 있을 때였는데, 지금의 좌수영귀선은 통제영귀선의 제도와 약간 다르기로 이하에 그 제식을 붙여 써둔다. 전라좌수영귀선의 치수, 길이, 넓이는 통제영귀선과 거의 같으나 다만 거북머리 아래에 또 귀신머리를 새겼으며, 복판 위에 거북 무늬를 그렸고, 좌우에 각각 두 문이 있으며, 거북머리 아래에 포구멍이 2개, 舷版 좌우에 포구멍이 각각 1개씩, 현란 좌우에 포구멍이 각각10개씩, 복판 좌우에 포구멍이 각각 6개씩이고, 좌우에 노는 각각 8개씩 이다.

거북선은 임진왜란 때 돌격함으로 조선 수군이 연승을 거두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전란 이후 그 모양이 조금씩 변하여 용머리[龍頭]는 거북머리[龜頭]로 되고, 치수도 일반적으로 장대(長大)해지는 등 차차 크게 건조되었는데, <충무공전서>의 거북선 그림은 이를 반영하고 있다.
특히 거북선 그림과 함께 건조에 필요한 세부 치수(배 길이 105자, 너비 34자, 깊이 7자 5치 등)가 기록되어 있어 거북선의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