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일본 오와리(尾張) 출신으로 처음 이름은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였으며 29세 이후에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로도 불렸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밑에서 활약하면서 차차 두각을 나타내었고, 1582년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그의 후계자로 등장했다. 노부나가의 후계로서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다이라(平)씨로 성을 바꿨다.

1585년 관백이 되자 후지와라(藤原)씨로 성을 바꿨고, 1586년 대정대신(大政大臣)의 지위에 오르자 도요토미(豊臣)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이렇게 확보한 정치적 실권을 배경으로 1587년 전국(戰國) 시대의 반대세력을 제압하고 일본 국내를 통일함으로서 모모야마(桃山) 시대를 열었다.

국내문제가 일단락되자 중국 대륙 정복을 시도하는데, 1587년 선조 20년에 당시의 대마도주 소 요시게(宗義調)를 통해 조선과의 교섭을 시작하여 명나라 정복에 협조하여 줄 것을 요청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묘 정면에서 바라보는 모습 도요토미 히데요시 묘

그러나 4년간에 걸친 교섭이 실패하자 1591년 관백의 자리를 양자인 도요토미 히데츠구(豊臣秀次)에게 양도하고 자신은 태합(太閤)이 되어 정한령(征韓令)을 내렸다.
이듬해인 1592년 가토 기요마사ㆍ고니시 유키나가 등의 장수들을 선봉으로 20만여 명의 육군과 수군으로 조선침략을 개시하고 나고야(名護屋) 성에서 전쟁을 지휘했다.
1593년 일본군이 서울을 철수한 뒤에 고니시 유키나가ㆍ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와 함께 일본에 건너간 명나라의 강화사절인 심유경 등을 만나 칠조목을 조건으로 화의를 추진하도록 하고, 이 틈을 이용해 조선의 침략군에게 반격을 명령하여 진주성을 공격케 했다.

그 후 약 3년 동안 일본과 명나라 사이에 강화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거의 전쟁은 휴전상태였다.
1596년 강화교섭이 결렬되자 이듬해인 1597년 다시 군대를 동원해 정유재란을 일으켰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1598년 자신의 죽음을 숨기고서 철군하는 유명을 남긴 뒤 후시미(伏見) 성에서 병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