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락암굴과 정렬부인 설화

시락암굴과 정렬부인 설화

마산시 진전면 시락리 낙동 초등학교에서 동쪽으로 약 2Km 떨어진 해안의 절벽 밑에 암굴이 하나 있으니 이름하여 시락암굴이다.
평소 7, 8명의 인원이 수월하게 들어앉을 수 있는 이 암굴은 만조 때가 되면 바닷물이 입구에까지 차 오르지만 그 이상은 더 물이 들지 않으며 옛날부터 난리가 있을 때는 마을 사람들의 피난처로 이용되어 왔다.

옛날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어느 젊은 부부가 난을 피해 이 암굴에 와서 숨어 지냈다. 때는 마침, 해상의 도처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승전고가 한참 드높던 무렵이었다. 도망치던 왜적의 배 한척이 때마침 이 근방을 지나다가 문득 암굴 속의 인기척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대번에 암굴을 수색하여 젊은 부부를 끌어낸 다음, 남자는 그 자리에서 무참하게 베어 죽이고 기절한 부인을 배에 싣고 달아났다.

얼마 후에 부인이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자신은 적병들에 의해 사지가 결박되어 있었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당장이라도 물 속으로 뛰어들고 싶지만 부인은 이미 그나마도 뜻대로 할 수 없는 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총중에도 번번히 욕을 보이려고 달려드는 왜병과 싸우지 않으면 아니되었지만 부인은 안간힘으로 이들을 물리쳤다. 그러나 연약한 여자의 힘이 이 많은 짐승들을 어떻게 감당하랴, 장차 부인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왜적들은 번갈아 찾아와서는 한편으로는 얼르기도 하고, 혹은 힘으로 달려들어 꺽으려고 하였지만 끝내 틈을 주지 않고 반항을 하니 그들도 어쩔 수 없이 물러나곤 하였다.

그 날밤, 부인은 힘에 지쳐서 쓰러진 채로 그만 깜박 잠이 들었다. 그런데 비몽사몽간에 뱃전에서 남편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깨어보니 꿈이었다. 옆을 둘러보니 왜적들은 모두 곯아떨어져 자고 있었다. 이때 문득 부인의 머릿속에 한가닥 계책이 스쳐갔다. 부인은 자기의 몸속 깊이 지니고 있던 장도를 뽑아들었다. 그리하여 부인은 앉은 자리의 배 밑바닥을 파기 시작했다. 왜적들은 오랫동안 패전에 심신이 모두 지쳐 있었으므로 실상은 누가 업어가도 모를 만치 깊은 잠속에 빠져 있었다. 부인은 다만 일심으로 손을 놀렸다. 오직 나라와 남편의 원수를 갚으리라는 서리 찬 집념 하나로 뱃바닥을 파들어 갔던 것이다.

이윽고 배 밑바닥에 쥐구멍 만한 구멍이 하나 뚫렸다. 부인은 계속 그 구명을 넓혀 나갔다. 초저녁부터 시작한 일인데 이미 밤을 지나고 멀리 수평선위에서 희미하게 먼동이 밝아오고 있었다. 마침내 마지막 구멍을 뚫는데 성공을 하였고, 그 구멍으로부터 바닷물이 펑펑 차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왜적들은 그제서야 하나, 둘 잠에서 깨어났지만 때는 이미 늦었으니 그들은 모두 아우성을 치며 뱃속을 우왕좌왕하다가 배와 함께 침몰되어 모두 물귀신이 되고 말았다. 한편 부인은 천지신명께 감사 기도를 드린 다음 큰 소리로 남편의 이름을 부르면서 바닷속으로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