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 앵두나무 설화

효자 앵두나무 설화

임진왜란 이후 삼백 칠십여 년 쯤에 가야읍 백산고을에 성품이 청렴결백하고 효행이 돈독했던 선비가 있었다. 윗대에는 대가벌족(大家閥族)으로 중앙을 무대로 삼던 특권층에 속하였다. 그 당시 중앙의 정치정세의 불안과 탐관오리들의 부조리함을 꺼려서 일직 하향해서 은둔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위로는 부모님을 모시고 아래로 자녀를 거느리고 낮이면 들에 나가 흙과 벗삼고, 밤이면 사랑방에 자녀들을 불러 모아 글과 행실을 가르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지위도 명예도 권세도 없는 평범한 농부였다.

어릴 때부터 근신하고 어버이 뜻을 어기지 아니하였다. 서당에 다니면서도 배움에는 마음이 없고 오로지 어버이 봉양에만 뜻을 두어 저녁이면 잠자리를 도와 드리고 아침 일찍 문안하는 범절을 다하였다. 조석으로 음식 드리기를 성심과 성의를 다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지치거나 게으름이 없었다. 어버이께서 병으로 불안하시면 근심의 빛이 얼굴에 떠있고, 음식을 전폐하면서 밤새도록 눈 한번 붙이지도 아니하였다. 또한 야 삼경에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어버이 대신 고통받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하기도 하였다.

아버님의 등에 등창이 나서 종기에 고름이 가득해지자 입으로 빨아내어 시원하게 해 드리니 마침내 병이 위급하여 운명하시려 할 제 효자는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리우게 하니 한나절 동안 다시 소생하였다가 끝내는 운명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운명하시자 애통에 잠긴 나머지 3년 동안 굴건제복(屈巾祭服)을 벗지 아니하였다. 장례를 지낸 뒤에도 매일 산소를 살피고 엎드려 통곡함으로 무릎의 옷이 닳고 떨어져 구멍이 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대 효자의 나이 이미 예순이 넘은 백발이었건만 그의 어머님께서 앵두를 즐기시니 몸소 앵두나무를 심어 정성을 다하여 키우니 해마다 많은 앵두가 열려 그의 모친께서 부족함이 없이 즐길 수 있었다고 한다.

한데 그렇게 앵두를 즐겨 잡수시던 어머니가 별세를 하시자 매양 앵두나무를 어루만지며 슬퍼하였다. 그후 앵두나무에는 꽃만 피었지 열매를 맺지 아니하였다고한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신기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 앵두나무를 '효자나무'라고 일컬었다. 고사에 비유한 비문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