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시기 논개묘 설화

탑시기 논개묘 설화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방지부락, 속칭 탑시기라는 곳에 잡초가 무성하고 흙이 허물어진 볼품없는 묘가 하나 있다. 이 무덤이 바로 임진왜란 때 왜장을 안고 남강에 빠져 죽은 논개의 무덤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논개는 주달문이라는 훈장의 딸로 태어났다. 논개의 아버지가 서당의 훈장으로 계셨기 때문에 논개는 어려서부터 한학과 서예를 익히며 행복하게 살았으나 논개가 십오세 깨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불행의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논개와 어머니는 숙부의 집에 몸을 의탁하였으나 숙부집도 생활형편이 몹시 어려웠다. 그러자 숙부는 논개를 어떤 집안의 민며느리로 팔아버리고 말았다. 이 사실을 눈치챈 논개와 어머니는 멀리 도망하였다. 이에 그 집안에서 장수 현감 최경회에게 상소를 올리어 두 모녀를 잡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정면에서 바라보는 논개묘 모습 논개묘

장수현감은 논개와 어머니를 잡아다가 문초하던 중 사연을 듣고 보니 신세가 너무 가련하여 무죄 방면하였는데 모녀는 갈 곳이 없어 장수현감 부인에게 있을 만한 곳을 부탁하여 논개가 현감부인의 침방으로 있게 되었다고 한다. 평소에 몸이 약한 현감 부인은 논개의 됨됨이를 살피어서 현감의 부실로 삼게 하였다.

한편 세월이 흘러 민족의 비운인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되자 최경회는 의병 육 천여명을 거느리고 진주성으로 떠났는데 이 때 최경회의 부실인 논개도 그를 따라 진주로 가게 된 것이다. 진주성 싸움은 의병과 주민들이 합심하여 왜병에게 강력하게 대항하였으나 워낙 수적으로 열세인데다가 그들의 신무기인 조총에 견디지 못하고 함락되고 말았으니 최경회공도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 때 논개는 기생의 적에 들어 있었는데 진주성을 함락한 왜병들은 진주의 모든 기생을 불러 축하연을 열었다. 이 축하연에 논개도 물론 참석하였는데 기생 중 논개의 미모가 빼어나게 아름다운지라 왜장이 논개를 가까이하였다. 논개는 '기회는 지금이다.'라고 마음을 굳게 먹고 왜장을 안고 남강에 뛰어들었다. 이리하여 논개는 남편인 최경회 공은 물론이고 민족의 원한도 갚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안 의병들은 거룩한 논개의 넋이라도 위로하고자 시신을 건져 운반해가던 중 현재의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방지부락에 논개의 집안인 주씨가 살고 있음을 알고 이곳에 안장을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 당시는 주씨 집안에 기생이 있다는 것이 집안의 수치라고 여겨 은폐시켜왔기 때문에 지금껏 찾는 사람도 없이 묘가 황폐화 되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