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무과시험에서 낙마

십경도는 이순신의 생애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부분 10가지를 그림으로 묘사한 것으로 정창섭, 문학진 교수의 작품이다. 이들 십경도는 현충사의 본전 안 벽면에 걸려 있으며, 1970년 4월 한국기자협회에서 기증한 것이다.

첫 무과시험에서 낙마(청년시절)

이순신이 스무 살이 될 즈음, 북쪽 변경에는 오랑캐들이 넘나들며 우리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남쪽바닷가 마을에는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순신은 겨레의 방패가 되어 나라를 구하리라 결심을 하였다. 당시 무언의 길이 비록 문인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고 있었지만 그것이 나라에 충성하는 길이라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이순신은 28세가 되던 해 8월, 훈련원에서 실시하는 별과시험을 치렀다. 그런데 이순신은 시험장에서 무예시험 중에 말을 타고 달리다가 불행히도 말에서 떨어져 왼쪽 다리가 부러졌다.
이를 바라보던 모든 사람들이 “저 사람은 죽었구나.”고 놀라고 있을 때, 이순신이 한발로 일어나 곁에 있는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다리를 매고 걸어 나와 보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순신이 얼마나 자조ㆍ자립정신이 강했던가를 보여준 일화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렇듯 이순신의 일대기를 보면 남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는 자조ㆍ자립의 정신을 자주 볼 수 있다.
이순신은 그러한 성품과 신념 때문에 32세가 되어서야 과거에 급제하였고, 45세에 정읍현감, 47세에 전라좌수사의 벼슬에 올랐다 사대부 제도가의 자손들이 30세 안팎에 큰 벼슬에 올랐던 사실과 비교하여 출세가 상당히 늦었음을 알 수 있다.
십경도에 있는 이순신장군 첫 무과시험에서 낙마했을 때의 모습 십경도2-첫 무과시험에서 낙마

이순신의 죽마고우인 유성룡(柳成龍)은 그의 저서 징비록(懲毖錄)에서 “조정에서 공을 밀어주고 끌어주는 이가 없어 급제한지 10여년이 지나도록 출세하지 못했다.”고 술회하였다.
이순신은 자기의 출세를 위하여 권문세가의 문을 두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율곡 이이가 유성룡을 통해 이순신을 만나보기를 청하였고, 유성룡도 만나보라고 권한 사실이 있었으나, 이순신은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 말을 들은 율곡과 유성룡은 이순신의 인격에 감탄하였다. 이순신은 일가친척의 힘을 빌어 벼슬길에 오르는 것도 원치 않았던 것이다. 후에 이순신은 32세가 되던 1576년 2월에 무과에 합격하였다. 그해 12월,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으로 첫 벼슬길에 나갔고, 이듬해 훈련원 봉사가 되었다. 이순신이 37세 되던 해, 수군생활의 시작이었던 발포만호로 있을 때, 상관인 수사 성박이 사람을 보내어 객사 뜰에 있는 큰 오동나무를 베어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나라의 물건이니 벨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한다. 이에서도 공의 바르고 옳은 일이면 행하고 그른 일이면 대항하여 싸웠던 정의의 정신을 또한 찾아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