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해전

십경도는 이순신의 생애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부분 10가지를 그림으로 묘사한 것으로 정창섭, 문학진 교수의 작품이다. 이들 십경도는 현충사의 본전 안 벽면에 걸려 있으며, 1970년 4월 한국기자협회에서 기증한 것이다.

노량해전(충무공의 최후)

1598년 8월 17일,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장수들은 철군을 하기 위해 병력을 울산, 부산, 사천, 순천 등지로 집결시켰다.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 장수 진린과 함께 연합함대를 거느리고 왜교(倭橋)에 머무르고 있는 고니시의 부대를 공격하였다.
이때 명나라의 육군 장수 유정(劉綎)도 가세하여 수륙양면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왜군들이 견고한 진지 속에 숨어서 대항함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다만 왜교로부터 철귀하는 바다를 봉쇄하고 말았다. 즉 왜교 포구 외양에 위치한 장도(獐島)와 유도(柚島)에 결진하였다.
일본군들은 육지와 바닷길이 막히자 크게 당황하여 유정과 진린에게 많은 뇌물을 바치고 뱃길을 열어 일본군의 철수를 허용하도록 종용하였으나, 이순신은 단호히 이를 거절하고, 더욱 더 해상방비를 강화하였다. 그러자 일본군은 남해 등지에 산재해 있던 전선을 총동원하여 유도 등지를 가로막고 있는 조선 수군을 견제 또는 격파하면서 마지막 탈출의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11월 18일 저녁, 무수한 일본 전선들이 노량에 서서히 집결하였다. 이들은 이순신이 예상한 대로 노량과 왜교의 중간지점에 결진하고 있는 조선 수군을 협공하려는 것이었고, 그 수는 무려 500여척에 달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그날 밤, 왜교의 해상봉쇄를 해제하고 유도를 출발하여 노량 근해에 집결한 일본 수군을 섬멸하기 위해서 작전을 개시하였다.
십경도에 있는 노량해전 속 이순신장군 삽화 모습 십경도10-노량해전

다음날 새벽 2시경, 이순신이 이끄는 연합함대는 노량에 도착하여, 여기서 함대를 좌우로 나누어 전투태세를 갖추고 주위의 성에는 복병을 배치한 후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포성과 북소리는 고요한 바다를 가르고 기습공격을 당한 일본 전선은 당황하여 일시 흩어졌다가 다시 대열을 갖추어 결사적인 반격을 가해왔다.
밤새도록 치열한 격전이 계속 되었다. 조선 수군은 총포를 일제히 발사하여 맹렬히 공격하였다. 이와 같은 조선 수군의 맹렬한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던 일본군을 사기가 저하되어 관음포 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도망칠 물길이 이미 조선 수군에 의해 막혀 있음을 알았다. 궁지에 몰린 일본군은 최후의 발악을 하며 반격을 전개함에 따라 또다시 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처럼 혈전이 거듭되고 있는 상황에서 지휘를 하던 이순신은 적이 쏜 유탄에 맞아 쓰러졌다. 그리고 “방패로 나를 가려라.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이때가 1598년 11월 19일 새벽, 이순신의 나이 54세였다.
이순신의 유언대로 이순신의 큰 아들 회(薈)와 조카 완(莞)은 이순신은 배안으로 옮기고 이순신을 대신에 독전기를 흔들면서 전투를 계속하여 낮 12시경에 200여척의 일본 전선을 격파하였다.
바다에는 왜군들의 피와 부서진 뱃조각과 일본군의 시체가 낭자하였다. 그러나 적장 고니시는 격전 중에 간신히 달아나고 그때까지 도주하지 못한 50여척의 일본 전선들도 뿔뿔이 흩어져 도망하였다.
이리하여 7년간의 임진왜란은 이순신의 안타까운 전사와 함께 대승리로 막을 내렸다.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도 싸움의 승패에 대하여 유념하고 나라사랑의 뜨거운 정열로 가득 차 있었던 이순신이었기에 400여년이 지난 오늘날 까지도 이순신은 온 국민으로부터 한결같은 추앙을 받아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