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대첩

십경도는 이순신의 생애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부분 10가지를 그림으로 묘사한 것으로 정창섭, 문학진 교수의 작품이다. 이들 십경도는 현충사의 본전 안 벽면에 걸려 있으며, 1970년 4월 한국기자협회에서 기증한 것이다.

명량대첩(통제사 재임명)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로 임명되어, 겨우 12척의 전선만으로 전세를 수습해야했을 때, 조정에서는 이를 민망히 여겨 공에게 해전을 버리고 육지로 올라와 싸우라고 하였으나 공은 해전을 폐(廢)할 수 없음을 말하고,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죽도록 힘을 다해서 싸우면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라고 장계를 올렸던 것이다.
당시 상황으로 본다면 일본군은 전선 500여척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조선군은 12척 밖에 없었기 때문에 상대가 될 수 없었지만 이순신은 끝내 해상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순신은 12척의 전선과 120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일본 수군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알맞은 유리한 지역인 벽파진으로 이동하였다. 벽파진은 진도의 동쪽 끝머리에 위치하여 해남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며, 남해상에서 서해로 빠져나가는 유일한 길목인 울돌목 즉, 명랑해협이 있는 곳이다.
이순신은 이곳을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을 막을 수 있으며, 적은 수로써 많은 적선을 막기에 알맞은 곳으로 판단했다. 더구나 명랑해협은 길목이 좁은 데다가 조수의 흐름이 빨라 대함대가 자유로이 활동 할 수 없는 곳이었다.
십경도에 있는 명량대첩 속 이순신장군 삽화 모습 십경도9-명량대첩

9월 14일, 일본 수군이 벽파진을 향하여 오고 있다는 첩보를 들은 이순신은 모든 전선을 출전시켰다. 일본 전선 133척이 조류를 타고 명랑해협에 돌입해 오고 있었다. 이에 이순신과 휘하 병사들은 “우리들이 다 같이 나라의 부름을 받았으니, 의리상 같이 죽고 사는 것이 마땅하다. 사태가 이에 이른바 에야 한번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아까울 것이냐?”는 굳은 결의로 일본군에 대적하였다. 울돌목을 빠져나온 일본 전선들은 외양에 들어서면서 순식간에 12척의 조선 전선을 겹겹으로 포위하면서 총포를 쏘아댔다.
이에 이순신은 군사들을 독려하여 전선에 장착된 총통과 각종 화살을 쏘며 반격을 가했는데, 점차 조수의 흐름이 조선군에게 유리하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이순신은 더욱 병사를 격려하고 독전하여 일본 전선을 총공격을 가하였고, 그 결과 일본군은 31척을 잃고 퇴각하였다.
이리하여 12척의 배로써 133척의 왜선을 물리친 명랑해전을 대승리로 육상을 마음대로 짓밟던 일본군의 기세를 꺾어 수륙병진의 야욕을 송두리째 부수어 버리는 큰 전환점을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