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도생활

십경도는 이순신의 생애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부분 10가지를 그림으로 묘사한 것으로 정창섭, 문학진 교수의 작품이다. 이들 십경도는 현충사의 본전 안 벽면에 걸려 있으며, 1970년 4월 한국기자협회에서 기증한 것이다.

한산도생활(삼도수군통제사 시절)

전쟁 초기에 일본 수군을 거의 섬멸한 이순신은 계속 적을 소탕하여 오다가 여수로부터 진영을 한산도로 이동하였다.
한산도는 산령(山嶺)에 둘러싸여 있어 일본군의 남해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요지였다. 이곳에서 일본군의 길목을 막으면서 둔전을 경작하여 군량을 마련하고, 나무를 베어 전선을 만들며, 쇠를 녹여 무기를 만들면서 쉬지 않고 다음 전투에 대비했다.
어려운 처지에서 이순신은 있는 힘과 지혜를 다하여 적의 재침에 대비하였고 적의 대함대를 앞에 두고, 내일의 전투를 위하여 허리띠를 풀지 않고 칼을 갈며 만반의 전투태세를 갖추었던 이순신의 임전태세야말로 유비무환의 자위정신을 행동으로 보여준 좋은 실례라 하겠다.
이순신은 남해해상 연해지역의 소탕작전을 꾸준히 계속하다가 1593년 7월, 좌수영을 여수에서 거제 한산도로 옮겨 왜적침략의 수로를 가로막고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있을 때, 곤궁에 빠져 있는 피난민을 정성껏 돌봐왔었고 통제사가 된 이후로는 더욱 민생문제와 군량을 염려하여 돌산도와 도양장(道陽場)에 군민 합작의 둔전(屯田)을 설치하였다.
십경도에 있는 한산도생활하는 이순신장군 삽화 모습 십경도6-한산도생활

그 뿐만 아니라 새로운 무기를 만들고 전선을 계속 건조하여 군비를 확충하였다. 즉, 일본 조총을 세밀히 검토하여 정철총통을 제조하였고, 염초(焰硝)를 끓여 만들고 각종 총포를 만들어 전선에 비치하여 주무기로 활용하게 하였다.
아울러 수군의 지휘권을 확립하고 군비를 재정비하면서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또한 한산도에 운주당을 설치하여 누구에게나 중요한 작전상의 의견이나 정보를 제공케 하였다.
이순신이 통제사로서 이룩한 큰 업적의 하나는 지휘계통의 일원화였다. 이제까지 연합 함대를 편성하여 많은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나, 원균 등의 시기와 불복종으로 인해서 지휘계통이 통일되지 못했었다.
1594년 2월부터는 지난날 이순신의 위력에 눌려 외해로 나오지 못했던 일본 수군들이 점차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므로 이순신은 함대를 출동시켜 일본 전선을 격파하면서 적의 집결지인 당항포를 습격, 21척의 왜선을 불태워 그들의 야욕을 한풀 꺾어 버렸다.
당항포해전이 있은 후, 4개월이 지난 7, 8월부터는 일본군들의 움직임이 전보다 조직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장문포(長門浦) 일대를 중심으로 연안과 각 포구마다 진지를 구축하고 장기간 머무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이순신은 수륙협동작전을 계획하고, 곽재우 등과 협동으로 장문포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순신은 진중생활로 인해 피로가 겹치고 기후가 나빠서 무서운 열병에 걸린 적이 있었지만 굽힐 줄 모르는 의지로 견디어냈다. 그 의지의 바탕에는 자주·자조·자립정신이 흐르고 있었는데, 이는 아무 지원도 없는 어려운 진중생활에서도 군량을 비축하고 쇠를 모아 총포를 만들며 군비를 강화하여 연전 연승의 빛나는 공적을 쌓게 한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