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족을 무찌름(함경도에서 초급 무관시절)
북쪽 변방에서 백성들을 괴롭히던 오랑캐들도 이순신이 조산보만호로 전출되어 가 국경을 지키자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하였다.
조산보만호로 부임한 이듬해(1587년, 선조 20년) 8월, 공은 녹둔도의 둔전관을 겸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 40세 때의 일이었다.
녹둔도란 함경도 경흥 고을에서 60리 떨어진 곳에 있는 섬으로 두만강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어귀에 있지만 조산보에서는 20리나 떨어져 있었다. 녹둔도 둔전관이란 이 섬의 농장을 관리하고 개척민을 보호하는 일을 하는 벼슬이었다.
녹둔도 둔전관을 겸하게 이순신은 지형을 조사하고 북병사 이일에게 아래와 같은 내용의 공문을 보내 병력 증강을 요청했다.
이러한 내용의 공문을 여러 번 보냈지만 이일은 이순신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순신은 하는 수 없이 튼튼한 나무로 방책을 세우고 그 곳에 10여명의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는 한편 백성들의 농사일을 도와주었다.

그 해 가을에는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기뻐하기도 하였지만 한편 불안하기도 하였다. 풍년이 든 것을 알고 곡식을 탐낸 오랑캐들이 쳐들어 올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느 날 섬 사람들이 논밭에 모두 나와 마을은 텅 비어있을 때, 오랑캐들이 몰래 쳐들어왔다. 그 때 마을을 지키던 진지에는 10명의 군사밖에 없었는데 오랑캐들이 엄청난 군사를 몰고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쳐들어왔던 것이다.
10여 명의 군사들은 용감히 싸웠으나 엄청난 수의 오랑캐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들에서 추수를 돕고 있다가 뜻밖의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군사들을 이끌고 오랑캐가 짓밟은 마을을 향해 달려왔다. 날쌘 장수들과 함께 오랑캐들을 쫓아가 사로잡혀 가던 우리 백성 60여명을 구했다. 이순신은 적과 싸우는 동안 왼편 다리에 화살을 맞았지만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까 봐 화살을 뽑고 용감하게 싸웠던 것이다.
이 녹둔도 싸움에서 이순신의 군사는 크게 승리했지만 10여명의 전사자와 수십 명의 부상자를 내었고, 농민과 부녀자 수십 명이 오랑캐에게 끌려가는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녹둔도 싸움 소식은 곧 북병사 이일에게 알려졌다. 이일은 수비 군사를 더 보내달라는 이순신의 요청을 거절하였던 것을 은폐하기 위해, 강제로 고을 옥에 가두고 거짓으로 이야기를 꾸며 조정에 올렸다. 조정에서는 이일의 보고를 받고, 충무공에게 그 책임을 물어 백의종군(白衣從軍)케 하였다.
이순신은 함경도 순변사(巡邊使) 밑에서 종군을 하여, 그 해 겨울 전공을 세우고 죄명을 벗었다. 이순신의 마음은 오로지 나라사랑에 바쳤지만, 벼슬도 없이 고향인 아산의 본가로 돌아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