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메뉴 바로가기 본문기사 바로가기

이슈

[이슈]1919 기미년 경남에서는?

3·1만세운동 현장을 찾아서

 

 

“대한독립만세!”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울려 퍼진 만세 함성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각 지역의 애국지사들은 독립선언서를 구해 지역민들의 시위 참여를 독려했다. 경남도 예외는 아니었다. 경남의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은 3월 3일 부산과 마산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된 것을 계기로 불타오르기 시작해 도내 전 지역에서 4월까지 격렬한 시위를 이어갔다. 그날의 현장을 둘러본다.

 

 

함안 ‘경남 만세운동의 시작’

3·9 연개장터 의거

경남에서 가장 먼저 기미년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역은 어디일까? 연구자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으나 대체적으로 함안을 최초라 꼽는다.

경남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9일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 연개장터 시위를 시작으로 13일 창녕 영산과 밀양, 14일 통영과 의령, 18일 합천과 진주, 하동 등 도내로 뻗어나간 것으로 본다.

지금의 칠서초등학교 이령분교가 들어선 곳이 100년전 경남 최초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연개장터이다. 칠북면 이령교회의 장로이던 김세민 선생과 사위 배동석 선생은 고종 황제의 장례식에 다녀온 후 3월 6일 예배당에 사람을 모아 거사를 준비했다. 그렇게 3월 9일 정오 연개장에 모인 1000여명의 군중은 해가 질 때까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날 시위는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끝났다. 연개장이 면 소재지와 거리가 멀어 일본 경찰의 귀에 뒤늦게 들어간 것이다. 경찰은 일본인이 드나드는 술집만 남겨둔 채 연개장을 폐쇄했다.

 

함안읍·군북면 의거

이 소식은 인근 대산과 칠서, 함안읍, 군북, 칠원 등으로 퍼져 지역마다 연속적으로 전개됐다. 특히 3월 19일부터 이틀간 이어진 함안읍~군북면 의거는 상당히 치열했다.

함안읍 장터(현 함안파출소 일대)에 모인 군중은 독립운동 사실증명서를 받아 파리에서 독립을 청원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경찰서와 등기소, 우편국을 습격했다. 

또 함안군수를 끌어내 만세를 부르도록 위협했다. 그래도 거부하자 옷을 찢고 때린 후 군중 앞에 세워 친일세력에 경종을 울렸다.

다음날 군북 냇가에 모인 5000여명의 군중은 돌멩이와 태극기를 양손에 쥐고 군북경찰관 주재소까지 나아갔다. 이날 일본 경찰의 발포로 애국지사 21명이 사망했다. 일본인 사상자 역시 12명이 넘어 당시의 서슬 퍼런 상황을 짐작게 한다.

 

밀양 ‘무력 항일운동 본산’

2016년 항일테마거리 조성

밀양은 ‘독립운동의 성지’라 불린다. 그만큼 항일독립운동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영화 <암살>에서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요”라는 대사로 잘 알려진 약산 김원봉 선생이다. 밀양은 그가 이끌었던 항일 무력 독립운동 조직인 의열단의 본산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전부터 밀양에는 대규모 만세운동이 있었다.

지금의 밀양시 내일동 관아 앞 도로와 아리랑시장 일대에서 1919년 3월 13일 1000여명이 태극기를 품고 만세를 외쳤다. 일제강점기 이곳에 밀양장터와 밀양경찰서가 있었다.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 시위에 참여했던 윤세주, 윤치형 선생은 스승인 전홍표 선생과 함께 고향에서의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부북면사무소에서 등사기를 훔쳐 아북산으로 올라 빛을 가린 채 독립선언서를 제작할 정도로 철두철미했다.

드디어 3월 13일. 군중들은 독립선언서 낭독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불렀다. 일본은 부산에서 급파되어온 헌병과 수비대를 내세워 시위대를 탄압했다. 그럼에도 다음날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까지 가세해 저항을 이어갔다.

주동 인물들이 체포되는 가운데 윤세주 선생은 만주로 건너가 김원봉 선생과 의기투합해 1919년 11월 의열단을 창단했다. 1920년 12월 의열단원 최수봉 선생이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일화는 유명하다.

 


 


고성 배둔장터서 ‘기세등등’

1919년 3월 20일 오후 1시, 구만면에서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를 신호로 800여명의 시위 군중이 회화면 배둔장(현 배둔시장)으로 모여들었다. 일찍이 소식을 접한 일본은 헌병과 경찰을 동원해 총칼로 시위대를 위협했다. 분노한 시위대는 오히려 헌병을 포위하고, 그들이 탄 말의 귀에 나팔을 불며 조롱하는 식으로 맞섰다. 이날 일본은 주동 인물조차 잡지 못하고 애를 먹다가 시간이 지나서야 검거에 나섰다고 한다. 당시 배둔장터 일대에 속하는 현 배둔시외버스터미널 앞 소공원에 이 날의 만세운동을 기리는 창의탑이 있다.

 

진주 걸인·기생도 만세운동

기미년 3월 18일 진주 장날을 시작으로 전개된 진주지역 만세운동에는 연 3만9000여명이 나섰다. 특히 기생과 걸인까지 장터로 나와 만세운동에 동참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당시 태극기를 든 걸인 100여명은 “우리들이 떠돌아다니며 밥을 벌어먹는 것은 왜놈들이 재산과 인권을 빼앗아갔기 때문”이라며 성토했다. 다음날인 19일에는 진주권번 소속 기생 50여명이 촉석루를 향해 나아가며 만세를 외쳤다. 일본경찰에 체포된 한금화라는 기생은 손가락을 깨물어 흰 명주자락에 “기쁘다. 삼천리강산에 다시 무궁화 피누나”라는 혈서를 썼다고 전해온다.

 


 

이한나 기자  사진 이윤상 작가

 

  

방문자 통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