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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이슈]창원 웅천동 ‘주기철목사기념관’

주기철 목사 항일운동 기린 자료 전시

 

“나라 없는 백성을 어찌 백성이라 하겠습니까. 우리도 독립만세를 불러 나라를 찾읍시다.”

1919년 4월 1일 충남 천안군 아우내 장터에서 유관순 열사의 외침은 기미독립운동의 새로운 도화선이 됐다. 3월 1일 탑골공원을 시작으로 일제의 탄압에 반발한 민족봉기는 이렇게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경남 창원군 웅천면도 예외는 아니었다. 4월 3일 웅천마을에서는 주기용, 주기철 등 청년들과 주민들도 민족봉기에 합류했다. 이날의 함성은 마을 앞 3·1운동기념탑에 새겨져 있다. 당시 23살의 가장이던 주기철은 만세운동에 참가한 혐의로 1개월간 구류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주기철의 항일사상은 유관순 열사처럼 기독교신앙과 맞물려 있다. 민족주의자 남강 이승훈 선생이 평북 정주에 세운 오산학교에서 중학 3년을 보낸 것이 일생의 계기가 됐다.

 

“물러갈 자는 물러가고 따라갈 자는 一死를 覺悟하고 나서라”


연세대학교의 전신 연희전문을 중퇴하고 혼란기를 겪은 주기철은 일제하 민족운동의 요람인 평양신학교를 졸업하면서 일사각오(一死覺悟)를 일생의 신념으로 다지게 된다. 부산과 마산, 다시 평양을 거치는 목회와 신사참배 거부를 통해 주기철 목사의 항일정신은 절정에 다다른다. 다섯 번의 수감과 석방 총 5년7개월의 옥고 끝에 1944년 4월 21일 평양형무소에서 운명하기까지 47년 일생은 기미독립운동 100년을 맞은 지금까지 커다란 울림이 있다.

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 항일독립운동가 주기철목사기념관에는 그의 항일정신을 기린 자료를 전시해놓고 있다. 지난 2015년 국비와 시비 50억원을 들여 기념관을 조성했고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에서 위탁운영하고 있다.

정부는 1963년 항일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에게 유관순 열사와 동급인 대한민국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1968년 국립현충원에 가묘를 안장했다. 국가보훈처는 2007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글·사진 최석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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