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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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원시

    주기철

    역사인물

    • 위치
    • 주기철목사기념관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로 174 (남문동)
    • 문의처
    • 055-545-0330
  • 주요내용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 참여

    1936년 궁성요배·신사참배 거부운동 전개

    1944년 일경에 피체되어 옥고 중 순국

     

     경상남도 창원출신인 주기철 선생은 1916년에 민족사학 오산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창원군 웅천면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0년 12월에는 경상남도 창원 웅천청년운동단의 대표로 조선청년연합회의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의사로 선출되었다. 1926년 평양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부산 초량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5년간 봉직하였으며, 1931년에 마산 문창교회에서 다시 5년간 봉사하였다.

     

    1936년에는 길선주 목사의 후임으로 평양 산정현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였고, 이때는 일제가 교회와 기독교신도들에게 궁성요배와 신사참배를 본격적으로 강용하고 있던 때였다.선생은 기독교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계명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살아있는 일본왕이나 그 시조를 우상화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므로 「일본궁성요배」는 결단코 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황실요배 및 신사참배 거부안]을 제출하여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해서 종교적 항일 운동을 하였다.

     

    1938년 2월에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여 장로교 평안북도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자 이에 반대하여 투쟁하다가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3개월간 구금되었다.

     

    1938년 9월에 일제의 강요와 탄압에 굴복하여 전국 장료회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선생은 이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일사각오(一死覺悟)」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고 "조선민족의 애국심을 말살하려는 일본의 악정을 규탄하자"고 신사참배 거부를 설교하였다.

     

    1940년 7월에 일제는 소위 불경죄 및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실형을 언도하였고, 선생은 옥고를 치르다 1944년 4월 21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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