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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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양시

    변계량

    역사인물

    • 위치
    • 경상남도 밀양시 초동면 신호3길 5
    • 문의처
    • 055-359-5638
  • 주요내용

    밀양인.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 고려 우왕 11년에 17세로 등제하여 전교서(典校暑) 주박(主薄), 진덕박사(進德博士)를 역임하였다. 

    조선개국 후에 칭병(稱病) 불사(不仕)하다가 태조 5년(1396년)에 비로소 교서감승(校書監丞) 지제교(知製敎)로 나아갔다. 

    태종 8년(1408년)에 문관들을 친시(親試)하였는데 공이 장원으로 뽑혀 예조우참의(禮曹右參議) 겸 수문전직제학(修文殿直提學) 지제교(知製敎)로 특배되었다. 동 17년에 예문관 대제학 겸 대사성으로 숭배되고 다음해에는 우보객(右寶客)을 겸하고 다시 예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로 옮겨졌다.

    세종때 집현전을 세우자 동 2년에 공이 그 대제학을 겸하게 되었으며 동 8년에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 겸 세자이사(世子貳師)로 승배되었다. 공(公)은 어려서부터 총명이 뛰어나고 호학불권(好學不倦)하였으며 정포은(鄭圃隱), 권양촌(權陽村)의 제문에서 수학하여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20여년간 대제학으로서 국초의 전장(典章) 문물(文物)에 공헌이 많았고, 중국과의 외교사명(外交辭命)을 전담하였다. 
    세종때 중국에 대한 금, 은의 세공을 영제(永除)케 된것도 공의 제진(製進)한 문자에 말미암은 바 컸다. 여러 차례 대, 소 과거의 고시관을 맡아 한결같이 지공 엄정하게 사류를 선발함으로써 고려 말기의 문란했던 과거제도를 이때 바로잡게 되었다. 
    공은 마음가짐이 견확(堅確)하여 강한 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량이 넓어 소절(小節)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흥학(興學), 천현(薦賢)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삼았으니, 국초의 명사들이 공의 문에서 많이배출되었다. 유저로 [춘정집(春亭集)]이 널리 유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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