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각 시군별로 간략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시·군 홈페이지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양산시

    임씨부인

    역사인물

    • 위치
    • 문의처
  • 주요내용

    웅상읍 명곡리는 옛날에는 울산땅 이었다. 이 곳에 특별한 열부가 있었으니 그는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여 옛 사람이 지은 행장에 삼종지도와 부인지덕을 겸비한 특별한 열녀라 하였으니 그 열부는 서하임씨 광세의 따님으로 태어나서 안경로에게로 시집왔다. 열부 임씨는 혼례는 갖추었으나 우례치 않고 남편만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구행장에 야릇한 말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말은 『신랑이 신부에게 폐백을 주는데 폐백을 담은함이 열리지 아니하므로 부득이하여 도끼로 함을 깨뜨렸다』하였고 또,『사람들이 말하기를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고 공론이 분분하더니 과연 3일 만에 돌아간 신랑이 급서하였다』고 행장문에 기록되어있다. 열부 임씨는 신랑을 떠나보내고 우례할 날을 고대하며 준비에 분주하였을 때 남편이 떠난 지 하루가 못되어 신랑이 별세했다는 급한 기별이 있어 임씨는 허둥지둥 달려갔으나 남편은 시체로 변하였으니 말도 할 수 없고 울음도 나오지 아니하였으며 상장을 어떻게 할 것인지 먼 산만 바라다볼 뿐이다. 시가에서는 장지를 택하지 못하여 성복 후에 출빈하였다.

    임씨는 빈소 옆을 떠나지 않고 있으니 시가 사람들은 행여나 무슨 일이 있을까 염려하여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임씨는 무슨 일이든지 영전에 말씀하여 생존한 부부와 같았다. 3년 동안 죽물로 연명하며 성복 때 입은 옷 그대로 머리도 빗지 않고 하루같이 지냈다. 3년상을 마친 뒤에 어느 날 실화로 불이 났을 때 동네 사람들이 불을 끄고 집안 식구도 정신없이 갈팡질팡할 때 임씨는 자약한 태도로 말하기를 여자는 삼종지의를 지키는 것이 부도인데 어려서는 부모에게 의지했으나 출가 하여 남편에게 의지하지 못하였고 일절 혈육도 없으니 자식에게도 의지할 수 없으니, 이제 황천에서 쓸쓸하게 있는 남편을 따라가서 생전에 부부가 의지하지 못한 한을 풀어 여자의 도리를 지켜야겠다고 하고 번개같이 불속에 뛰어 들어가니, 화염이 충천하여 구출할 길이 없었다. 동중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애처롭게 생각하고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 사실이 울산 읍지에 기재되어 있을 뿐이다. 이 사실은 조선 왕조 숙종 연대로 알려지고 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