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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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산시

    이징석

    역사인물

    • 위치
    • 문의처
  • 주요내용

    양산읍 명곡리의 이징석장군의 무덤 옆에 서있는 묘비에 국왕이 내리신 사제문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생각하건대 경은 큰 산봉우리에서 뽑아낸 정기를 모은 시대적 영웅호걸이라 성품은 단정결백하고 기국은 활발하였으며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특진중시에도 급제하여 금군이 추앙하고 복종하였으며 무예는 육도삼략에 달하였고 재능은 버들잎을 뚫는데 이르렀도다. 일찍이 선왕 세종대왕을 섬겨, 호랑이의 발톱과 어금니처럼 힘을 길러 남쪽으로는 왜구를 치고 북쪽으로는 오랑캐를 치며 바람과 같이 날고 달려서 뛰어난 공적을 훌륭히 세웠기에 만백성들은 그대를 만리장성처럼 힘입었고 나라에서는 그대를 기둥과 주춧돌처럼 의지했도다.
    선왕 세종대왕께서는 그대를 특별히 사랑하여 환대했으며 더욱 의를 돈독히 하셨도다. 내가 왕업을 잇기에 이르러서는 나를 돕고 나를 호위하였도다.
    내 그대의 공적을 아름답게 여겨 종에 새기고 공신각에 그리게 하여 황하와 같은 큰 강이 말라서 띠처럼 되고 태산이 닳아서 숫돌이 되도록 기쁨과 슬픔을 길이길이 그대와 함께 하려고 하였더니 하늘도 어찌하여 한 늙은이를 돌봐 남기지 않고 갑자기 불행하게 하였는고, 부음을 접한 이래로 진실로 애석하기에 여기 예관을 보내어 변변치 못한 재물을 베풀도록 시켰으니 영혼이 어둡지 않으면 이 한잔을 흠향하기 바라오.」

    세조 7년 4월 24일 국왕 세조 씀이라고 적혀있다.
    『역사시대 이후 국왕이 신하의 죽음을 슬퍼하여 하사한 제문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내용처럼 무게 있는 제문은 보기 드문 일이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이 사제문은 한 폭의 그림처럼 한눈으로 이징석 장군이 평생에 쌓아 올린 업적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장군은 후세에 빛을 남긴 사람 중의 한사람이라 한다. 장군은 1395년에서 1461년 사이의 인물로서 세종3년 8월에는 연일진 병마절제사가 된 후 경상좌우도 병마절제사를 역임했고, 도원수 최윤덕장군의 부장인 『조전절제사』가 되어 당시 상황으로 3,010명이란 최대의 병력을 지휘한 명장이 되었다. 그 후 중추원사 함경도 및 평안도절제사, 병조판서, 판중추원사, 도총관 등을 지낸 후 1458년 하야하니, 세조는 그 공을 치하하여 장강공의 시호를 하사함과 동시에, 숭록대부 양산군으로 책봉하였다.

    계유정란(1453년) 당시 장군의 동생 이징옥이 세조에 반기를 든 관계로 장군은 이에 억류되어 옥고를 치른 일도 있고 그 후 열세차례 이상이나 세조측근중신들의 상소에서 장군의 삼대구족까지 연좌주살 하라는 소란을 겪었으나, 세조의 반대로 구명되었고, 도리어 세조는 장군에게 도진문의 중책을 내리게 되니 세조측근중신들은 안절부절못 하였다. 단종 원년 11월 6일 실록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중신들이 이징석의 『좌익공신3등』의 녹훈을 모략하는 진언을 했으나 세조가 이를 물리쳤다고 하는데, 이 점에 있어서 후세사가들이 평하기를 『고려의 충신 정몽주선생의 유덕을 무너뜨릴 수 없어서 이 태조는 그의 유족들을 두둔한 사실이 있었던 것처럼 당시의 이징석 장군의 유덕을 세조는 무너뜨릴 수 없어서 두둔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때문에 윤갑식선생이 쓴 한국 인물사에서 이징석 장군을 생육신과 같은 수난의 공신으로 예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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