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성전투

경주성전투

임진왜란 때 박진(朴晋) 등이 경주수복을 위하여 싸운 전투로, 1차 전투는 1592년(선조 25) 4월 부산포에 상륙한 가토(加藤淸正)의 2만여 왜군이 경주를 공격하자 때마침 경주부윤의 교체가 있었는데, 전임 부윤 윤인함(尹仁涵)은 후임으로 오는 변응성(邊應星)이 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도주하였다. 이에 판관 박의장(朴毅長), 장기현감 이수일(李守一)이 군민 수천명을 모아 성을 지키려 하였으나, 박의장도 버티지 못하고 도주해버렸다. 이튿날 왜군은 영천을 점령하고 충주를 향하여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경주는 아군의 무저항으로 말미암아 왜적에게 무혈점령당하고 말았다.

2차 전투는 그해 7월 의병장 권응수(權應銖)가 영천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자, 경상좌병사 박진은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병력을 권응수의 휘하에 합세시켜 근 1만의 병력으로 그해 8월 경주탈환을 목적으로 권응수ㆍ박의장을 선봉으로 삼아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때 언양방면에 있던 적 구원병의 기습을 받아 박진의 군사는 패주하고 말았다.

3차 전투는 2차 전투에서 패한 박진이 재차 경주탈환을 결의하고 결사대 1천여 명을 모집하여 성 밑에 잠복시켰다. 한편, 화포장(火砲匠) 이장손(李長孫) 등이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라는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공격준비를 갖추었다. 이에 판관 박의장을 선봉으로 그해 9월 다시 성을 공격하였다. 왜적은 비격진천뢰의 공격으로 수백명의 사상자를 내고 근 1만석의 군량을 버린 채 이튿날 울산 서생포(西生浦) 방면으로 퇴각하였으며, 마침내 경주성은 수복되었다. 그뒤로 왜군은 비격진천뢰를 두려워하여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4차 전투는 1593년 8월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남도연안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을 철수시켰던 때이므로, 경주성 방면에는 명나라의 부총병(副總兵) 왕필적(王必迪)의 군사가 주둔하여 수비하고 있었다.
아군측은 경상좌병사 고언백(高彦伯), 영천조방장(永川助防將) 홍계남(洪季男)이 후원하고, 명군도 참장(參將) 낙상지 (駱尙志), 부총병 오유충(吳惟忠) 등이 와서 도왔다.
한편, 적장 가토와 모리(毛利吉成) 등의 군사는 서생포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주 경주성 방면을 공격하다가 마침내 8월 6일 불시에 수천의 병력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하였다. 이로써 쌍방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는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아군은 명군과 합세하여 끝내 적군을 격퇴시켰다.

이 싸움은 국난을 당하여 개전초에 분연히 일어난 민중의 힘으로 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으며, 특히 비격진천뢰라는 새로운 과학무기의 위력을 보여준 싸움이었다는 데에서 또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